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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공부노트 - 협종조합 도시 원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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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의 협동조합


협동조합, 원주에 오기까지


1960년대 원주 협동조합 1930년대 초 원주지역의 주요 사회단체였던 원주 노동회는 1928년 1월부터 소비조합 설립을 논의 했다. 1930년 12월 열린 임시총회에서 기존방침 을 변경해 여성을 중심으로 한 소비조합을 결성하 기로 하면 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원주노동회 회원들의 부인을 중심으로 한 원주부 인소비조합을 결성하게 됐다. 1931년 1월 13일 소속 회원 부인과 인근 지역 일반 부녀자까지 포함해 원주 읍내 정신유치원에서 ‘원 주부인소비조합’을 창립했다. 교양교육과 생계마련 을 위한 공동생산조직이 1933년의 조선여자소비 조합으로 발전되어 갔던 연장선상에서 여성이 주 체가 되어 소비조합을 설립한 것이다. 당시 원주 읍내에서만 부녀조합원 200여 명이 참 여했으며, 인근 촌락에서도 신청자가 쇄도했다. 이 는 원주노동회 뿐만 아니라 원주청년회와 우리구 락부, 신간회 원주지회와 형평사 원주지사 등 원주 지역 사회운동단체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서 각 단체 회원 부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으 로 보인다. 원주부인소비조합의 출자방식은 백미 1두를 1구 좌로 했으며, 취급 물품은 가정에 필요한 일용품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조합의 활동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침체상태에 빠졌다. 이는 원주노동회 등 원주지역 사회운동단체들의 활동이 일제의 탄 압으로 위축돼 원주부인소비조합의 운영에도 영향 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 소비조합운동 자체 가 협동조합 원칙에 벗어난 외상판매 등의 문제로 전국적으로 많은 수의 소비조합이 문을 닫게 됐다.
그로인해 원주부인소비조합도 외상액 급증 등으로 그 운영이 침체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원주 부인소비조합은 원주노동회가 해산되는 시점에서 중단 됐으며, 원주지역의 민간 주도 협동조합운동 은 해방 이후 재개될 때까지 중단됐다. 1930년대 중반 원주노동회는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속에 서도 활동을 지속하다가 일제의 해산명령에 따라 1935년 8월 강제적으로 해산됐다.

한국 최초, 부산 성가신협
우리나라에 신용협동조합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0 년 메리 가별(Sr. Mary Gabriella Mulherin, 1900 ~1993) 수녀에 의해서다. 한국전쟁 이후 경제적으 로 어려웠던 시절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메리 가별 수녀는 협동조합운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캐나다 안티고니쉬 운동을 접하게 된다. 이후 신용협동조합과 협동조합운동을 공부하고 돌 아와 1960년 5월 1일, 부산 대청동에서 한국 최초 성가신용협동조합을 창립했다. 이어 같은 해 6월 마찬가지로 캐나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장 대익 신부가 서울에서 두 번째 신협인 가톨릭 중앙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한다. 당시 부산에서는 협동조합 확산을 위해 협동조합 교도봉사회가 설립돼 협동조합운동 지도자들을 배 출하기 시작했다. 앞서 서울에는 장대익 신부가 캐 나다 유학 시절 보내온 자료들로 1957년 천주교 서울교구 내에 신용협동조합준비모임인 협동경제 연구회를 설치했다. 이들 조직은 부산의 협동조합 교도봉사회가 1963년 7월 서울로 이전하면서 ‘협 동교육연구원’으로 발전했으며 한국에 많은 지도 자를 배출하고 이 땅에 신용협동조합을 전파하게 됐다.

강원도 신협, 태백에서 시작
강원도 최초의 신협은 1962년 태백에서 시작됐다. 당시 춘천교구 소속의 장성성당 초대 주임이었던 이영섭 신부가 부산 성가신협 협동조합 교도봉사 회 회원들을 초청, 신자들과 교육을 받고 신협을 조 직한다. 성당을 중심으로 태백신용협동조합(장성 성당), 요셉신용협동조합(철암공소), 황지신용협 동조합(황지공소) 3개 신협이 동시에 창립됐다.




뉴욕서 만난 가별 수녀 신
협중앙회 부회장을 지낸 이경국 무위당만인회 회장은 지난 1989년 4월 미국 뉴욕에서 우리나라 에 처음 신협을 창립한 가별 수녀를 만난 일이 있었 다. 이 회장은 당시 메리 가별수녀가 신협운동에 대 해 전했던 이야기를 기록해 ‘신협운동50주년 기념 사료’에 실었다. 미국 뉴욕에서 강정렬 박사님의 주선으로 개최 되는 미주지역 제1차 한인신협 간담회에 참석하 였을 때였다.…가별 수녀님이 말씀하신 축사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신협운동은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운 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에서 신협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나의 오랜 소망이었습니다. 오 늘날 신용은 돈을 뜻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신 용’은 신뢰와 상호 믿음을 의미합니다. 신협운동 은 조합원 간에 가족과 같은 관계가 이루어지도 록 해야 합니다. 직원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그를 믿어주는 조합원을 배반하는 결과가 됩니 다.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에서 그 를 축출할 것이 아니라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 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줄 수 있는 용기와 신뢰 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협운동의 정신입니 다. 이러한 정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강해져야 하고 서로 신뢰하는 하나가 되어야 합 니다.”


천주교 원주교구 설정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원주교구 교황 요한 23세(1958~1963)가 공의회 개최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1959년 1월이었다. 현대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를 개혁하고 쇄신하는 것, 교회의 현대화가 공의회의 목적이었다. 공의회 개최를 공식 선포하고 3년 9개월에 걸쳐 준비한 끝에 1962년 10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했 다. 요한 23세가 한 번의 회기를 마치고 1963년 6 월 선종하자 그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공의회가 속개됐고 교회의 쇄신과 현대 세계의 제 반 사회문제 참여 등을 논의했다. 그 결과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등 4개의 헌장과 사회매체에 대 한 교령 등 9개의 교령,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 등 3개의 선언을 채택하고 1965년 12월 폐막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그 회의의 목적이 새로운 교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목헌장에서 ‘구 제해야할 것은 인간이며, 개혁해야 할 것은 인간사 회’라고 밝혔다. 당시 세계정세에서 핵병기를 보유 한 인류 상호간 영속적인 ‘지상의 평화’를 가져오 는 것, 빈부의 차가 극심화 된 국제사회에 정의에 합당한 질서를 실현하는 것, 분열한 교회 내에 일 치를 만드는 것, 이렇게 3가지 점에 핵심적인 목적 이 있었다. 이후 1960~70년대 전 세계 천주교회는 공의회 이 전과는 크게 다른 모습으로 폐쇄적, 권의주의적인 교회상에서 벗어나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 면서 사제와 함께 교회의 혁신과 사회문제 등에 나 서는 교회상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제2차 바티칸공 의회의 결과는 한국 천주교회에도 큰 변화를 가져 다 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창설된 천주교 원주교구와 지학순 주교였다.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1965년 3월 22일 천주교 원주교구가 설정된 후 6월 29일 지학순 초대 주교 가 부임한다. 앞서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3월 한국 천주교회가 자립교회로 성장했다고 판단하고 한국교회에 교계제도를 수립한다는 교서를 반포한 바 있다. 이러한 교계제도 설정은 서울·대구·광주 대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되는 한편 원주교구가 설 정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아울러 로마 교황청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다고 판단한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젊은 신부 지 학순을 주교로 선임했다. 이렇듯 교황 요한 23세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원주교구 설정과 지학순 주 교 선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지학준수교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교구장 지학순(池學淳) 주교 는 1921년 9월 9일 평안남도 중화에서 출생했다. 14세에 중화천주교회에서 세례(세례명: 다니엘)를 받고 원산의 덕원신학교에 진학하였으나, 공산정 권에 의해 학교가 폐쇄되자 남한으로 탈출해 서울 성신대학(현 서울가톨릭대학교)에 편입했다. 이후 6·25한국전쟁으로 국군에 지원 입대했고, 횡성전 투에서 부상으로 제대한 후 다시 복학했다. 1952 년 12월 15일 부산에서 노기남 주교에게 사제서품 을 받았으며, 1956년 로마 울바노대학에 유학해 1959년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 교회, 청주 북문로성당, 부산 초장동성 당 등을 거쳐 원주로 오게 됐다.
천주교 원주교구장 취임 교황 바오로 6세는 한국교회가 날로 크게 발전하고 있음을 알고 1965년 3월 22일, 춘천교구를 분리해 원주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에 지학순 신부 를 임명했다. 지학순 신부는 그해 6월 29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주교로 성성되고 원주교구장에 착좌 한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에 부임한 직후 1965년 9월 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마지막 회기인 제4회기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인 주교 6명과 함께 로마로 출 국한다. 마지막 폐회식까지 전 과정을 둘러볼 수 있 었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과 가르침을 철 저히 수용하게 된다. 귀국 후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 구가 이를 실현해 평신도 중심의 교구가 되도록 적 극적인 기반마련을 추진한다. 먼저 자신을 대신해 서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주교의 구상을 추진할 인 물 선택과 조직 구성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장일순 과 만남이 이루어졌고, 장일순을 통해 원주교구가 평신도 중심의 교구가 될 수 있는 조직기반이 마련 되도록 했다. 지학순 주교는 정치활동정화법에 의 해 활동을 제약받았던 장일순을 원주교구 사도회 회장에 임명해 그가 원주교구를 배경으로 활동할 수 있게 했고, 1967년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김 영주를 주교 비서실장이자 기획실장에 임명한다.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
원주교구는 교통이 불편한 산악지대와 경제적으로 낙후된 소도시, 농촌, 어촌, 광산촌을 포함하는 우 리나라 교구 중 가장 교세가 취약한 교구로 출발했 다. 지학순 주교는 지역주민의 복음화와 생활 개선 을 위해 교회를 중심으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 개하도록 했다. 1967년 원주 진광중학교를 설립했 으며, 이어 1973년엔 진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968년과 1978년에는 원주와 제천에 각각 가톨 릭센터를 개관해 종교 생활과 운동센터로써, 또 시 민들에게 가톨릭문화를 보급하고 휴식과 만남과 나눔의 공간으로 이용하도록 개방해 지역사회 개발과 문화향상에 공헌했다. 또한 매스컴의 사회적 역할이 지대함을 인식하고 1970년 7월 9일, 5·16 재단(현 정수장학회)과 합작으로 ‘원주문화방송’설 립에 참여해 원주와 인근 지역의 언론과 문화발전 에 기여했다.

부정부패 추방운동
1971년 10월 5일은 한국 천주교회가 그 면모를 일 신하게 된 역사적인 날이다. 그 계기는 ‘원주문화방 송’을 원주교구와 5·16재단이 공동 투자하여 설립 했는데 감사한 결과 세금조차 내지 않았을 뿐만 아 니라 회사 운영에도 부정이 드러났다. 5·16재단에 수차례 시정을 요구한 바 있었으나 오히려 권력을 내세워 교회 요구를 무시했다. 당시 부정부패가 만 연했고, 박정희 정권 독재화 권력이 국민 위에 군림 하던 때다. 이에 원주교구는 제도화된 부정부패와 근본적인 불의에 도전하기로 결정, 10월 5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약 1,500여 명이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를 갖는다. 사 제단과 함께 “부정부패 뿌리 뽑자”, “사회정의 이룩 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지학순 주 교가 앞장선 대열은 경찰의 제지를 받아 성당 마당 에서 밤을 새웠다. 그곳에서 이 땅에 가득한 부정과 부패와 불의가 가시고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되기 를 기도했다. 이 사건은 교회 안팎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 고, 종파를 초월하여 부정부패 추방운동을 지지하 는 성명과 시위로 이어졌다. 지학순 주교는 10월 18일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불의한 세력과 싸우 는데 신명을 걸었으며, 우리 교회는 단합해서 적극 적으로 투쟁해야 할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한다. 한국천주교 주교단은 11월 4일 ‘평신도의 날’을 맞아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공동교서를 발표 해 “교회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대변자로서 공동선과 인간 존엄성 회복에 앞장설 것” 임을 다짐 했다. 사회는 보수적이며, 소극적인 천주교의 변모 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따라서 원주교구는 일약 사회정의평화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이후 지학순 주교의 가난한 자와 노동자, 농민을 위한 사회적· 정치적 투쟁은 투옥되면서까지 계속됐다.

재해대책사업위원회 구성
1972년 8월 남한강유역에 내린 250mm의 집중 폭우로 대홍수가 일어났다. 원주를 비롯한 교구 관 내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자 지학순 주교는 이 사 실을 세계원조기관에 알리고 도움을 청해 국제 까 리따스와 독일의 미제레올, 두 원조단체의 도움을 얻었다. 1973년 1월 ‘천주교 원주교구 재해대책사업위원회’가 구성돼 종래의 교회 원조사업이 아닌 지역사회개발사업으로 차원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 했다. 이 재해대책사업은 1단계 긴급 구호사업, 2 단계 전답복구사업, 3단계 부락개발사업, 4단계 지 역개발사업으로 구분해 추진했다. 이 사업은 무조건적인 구호가 아니라 노력에 대한 대가로써 지원됐다. 경제적 지원은 무상이 아닌 연 차적 상환방법을 택하는 등 종래의 무조건적 구호 사업을 통해 의타심을 조장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자 했다. 또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계기 와 자존심을 잃지 않도록 물질적 지원에 앞서 교육 을 통해 상호 협동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의식전환 에 힘을 쏟았다. 이 같은 교육의 결과는 협동심을 일깨웠으며, 많은 농민과 광산근로자들이 가진 잠재적 능력계발에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많은 농촌과 광산촌에 신 용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현 한살림 등 생활협 동조합)으로 결실했으며,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유 수한 지도자와 조합이 성장하는 시초가 됐다.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가 선포되었고, 소위 ‘ 민청학련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중심으 로 180명이 구속·기소된 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지명수배해 김지하 시인 등이 체포됐다. 4월 대만 에서 있던 아시아주교회의와 유럽순방 차 출국했 던 지학순 주교는 7월 6일 귀국 즉시 김포공항에서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 된다.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된 젊은이들에게 금품 을 주었다는 명분으로 구속·기소된 것이다. 이후 석방된 지학순 주교는 7월 23일 “유신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며, 공판을 위해 비 상보통군법회의에 출두할 수 없다.”는 내용의 양심 선언을 발표한다. 이 사건은 교회 내외에 많은 파문 을 일으켜, 전국 각처에서 기도회가 개최됐고, 9월 23일 주교좌성당인 원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 현전국사제단’이 조직돼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사회정의구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 구치소에 수감 됐던 지 주교는 1975년 2월 17일에 석방돼 10개월 만에 원주교구로 복귀한다. 이러한 지학순 주교와 원주교구의 사회적 참여와 수난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1976년 2월 신구교가 참여한 원주기도회에서 ‘원주선언’을 발표한 데 이 어 3.1절을 맞아 명동성당 기도회에서 있었던 민주 구국선언사건인 ‘3.1절 명동사건’으로 많은 성직자 와 재야인사들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 건으로 교구 소속 신현봉 신부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기소되었는데 죄목은 정권탈취를 위 한 정부전복을 음모했다는 것이었다. 1982년 4월 엔 교구 소속 최기식 신부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 건’의 주범을 은닉했다는 혐의로 연행돼 구속되기도 했다.

사회복지법인 설립
지학순 주교의 1970년대 부정부패 추방운동, 정의 사회구현운동은 건강이 악화되는 80년대 초까지 근 10여 년간 지속됐다. 이후 교구청의 기구를 확 대해 사회선교국을 신설,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 인 사회복지사업을 전개했다. 그것을 계기로 1988 년 6월 사회복지법인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를 설 립인가받아 원주·영월 등 교구 지역에 복지시설을 운영해 원주교구 사회복지사업의 초석을 세웠다. 지학순 주교의 선종 1985년 남북한 ‘이산가족 고 향방문단사업’에 참가해 평양을 방문, 누이동생 ‘용 화’와 상봉하고 받은 충격으로 지병인 당뇨병이 악 화돼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지학순 주교는 요양 중에도 ‘한살림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남북장 애인걷기대회’ 본부장을 맡아 일을 주도하기도 했 다. 그러나 지병이 더욱 악화돼 1991년 12월 18일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한 이후 퇴원과 재입원을 반 복하며 투병 생활을 하다 1993년 3월 12일 향년 72세에 선종한다. 3월 16일 주교좌 원동성당에서 영결미사가 거행됐고, 제천 배론 성직자묘역에 안 장됐다.

출생에서 원주교구로 오기까지
1921.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남
1934. 중화천주교회에서 세례(세례명: 다니엘) 받음
1936.  소신학교 격인 서울 혜화동 동성상업학교 입학
1943.  덕원신학교 5학년에 편입학, 철학과와 신학과 공부
1949. 신학교가 폐쇄됨에 따라 월남
1950.  서울가톨릭신학교 편입학          
         6.25한국전쟁으로 입대
1952.  부상으로 후송돼 병원에서 제대          
         서울가톨릭대학교 복학          
         부산에서 노기남 주교로부터 사제서품 받음
1953.  거제도 포로수용소 교회 종군신부로 봉직          
         청주 북문로성당 신부로 봉직 1956. 로마 푸로파간다 대학(교회법 전공) 유학          
         교회법 석사·박사(1959년)학위 받음 1960. 청주교구장 비서 봉직           
         서울가톨릭신학대학 신학부 교회법 교수 2년 역임
1962. 부산 초장동천주교회 주임신부 봉직
1965.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







출처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