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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12-21
첨부파일 간식_끝판왕__떡볶이.jpg 조회수 362

 

간식 끝판왕, 떡볶이



간식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일컫는 말로 군것질 혹은 주전부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전부리’는 ‘때를 가리지 않고 점잖지 못하게 군음식을 자꾸 먹는다1’는 뜻의 동사 ‘주전거리다’에 어근을 두고 있는데, 간식을 사랑하는 이들에겐 참으로 뜨끔한 어원이 아닐 수 없다. 영어로는 어떨까. 간식을 의미하는 영단어 스낵(Snack)의 어원은 ‘깨물다’라는 뜻의 중세 네덜란드어 ‘Snacken’에서 찾을 수 있다.2 어쨌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꾸만 (깨물어) 먹고 싶은 무언가를 간식이라 지칭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간식은 무엇일까? 호불호야 당연히 개인차가 있을 테지만 떡볶이야말로 ‘국민간식’이라 부르기에 가장 적합한 음식이 아닐까 싶다. 떡볶이는 조리법이 다양한 음식이다. 고추장 양념을 가장 기본으로 하되, 각자 기호에 따라 다양한 맛을 추구한다. 매운 음식을 즐기지 않는 이들은 춘장에 버무린 ‘짜장떡볶이’ 혹은 참기름과 간장에 졸인 ‘궁중 떡볶이’ 를 즐겨 찾는다. 이밖에 양배추와 쫄면을 듬뿍 넣고 바글바글 끓여먹는 ‘즉석 떡볶이’, 크림과 토마토로 맛을 낸 ‘로제떡볶이’, 캡사이신을 뿌려 화끈하게 즐기는 ‘매운 떡볶이’, 기름에 달달 볶아 쫀득하게 먹는 ‘기름떡볶이’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뭘 하나 먹더라도 기왕이면 맛있게 먹고자 하는 한국인의 미식본능을 가장 잘 반영한 음식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떡볶이의 역사
우리나라 사람들이 떡볶이를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餠炙(병자)’라는 한자 표기로 여러 고문헌에 기록되었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의 국정을 기록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영조와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떡볶이를 자주 먹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19세기 말엽 편찬된 경상북도 상주의 양반가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비로소 ‘ 복기’라는 한글 표기가 등장한다.

『시의전서(是議全書)』 속 떡볶이 조리법
① 다른 찜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되
② 잘 된 흰떡을 탕에 들어가는 무처럼 썰어 살짝 볶아 쓰고
③ 찜에 들어가는 재료가 다 들어가되 가루즙만 아니 한다.
출처 한국식품연구원 < 맛 얼 제2권 3호 : 조선시대 한글 음식 조리서로 본전통 음식 조리법의 비교 - 떡볶이> 75p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충청도 지역 사대부
조리서인 『주식시의(酒食是義)』에는 떡볶이 조리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주식시의(酒食是義) 속 떡볶이 조리법
① 흰떡을 잘 만들어 닷 푼 길이씩 잘라네 쪽씩 내어
② 솥이나 퉁노구를 달구어 기름을 많이 두르고
③ 소고기를 가늘게 두드려 떡 썬 것과 같이 넣어 볶아
④ 송이와 도라지를 납작납작하게 썰고, 석이도 채 치고, 계란을 부쳐 채 치고
⑤ 숙주나물을 유장에 주물러 한데 넣고 질지도 되지도 않게 소금과 장을 맞추어
⑥ 생강, 파, 후추, 잣가루를 넣고, 김을 구워 부숴 넣고, 애호박, 오이, 갖은 양념을 다 넣어 써라.
출처 한국식품연구원 < 맛 얼 제2권 3호 : 조선시대 한글 음식 조리서로 본전통 음식 조리법의 비교 - 떡볶이> 73p



여러 문헌에서 확인해볼 수 있듯 원래 떡볶이는 궁중과 반가에서 명절을 쇠고 남은 가래떡과 소고기를 활용해 만들어 먹는 상당히 진귀한 음식이었다. 6·25 전쟁 이후가 되어서야 백성의 식탁에도 차차 오르게 되었다. 이 같은 떡볶이 대중화의 장본인을 ‘신당동 떡볶이’의 창시자 마복림 할머니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마복림 할머니가 우연히 들른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 그릇에 떨어뜨린 떡을 먹고 영감을 받아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양념에 갖은 채소와 떡을 볶아 개발했다 전해진다. 이를 서울 신당동에서 좌판에 놓고 판 것을 시작으로 그 일대 에는 이른바 ‘떡볶이 골목’이 조성되었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탕수육 ‘부먹찍먹(소스를 튀김에 부어먹는지 찍어먹는지)’ 논란만큼이나 뜨거운 이슈가 있다. 바로 쌀떡과 밀떡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떡볶이는 애초에 쌀로 빚은 가래떡으로 만들어 먹는 음식이었지만 1970년대 박정희 정권기에 추진된 혼분식장려운동(混粉食奬勵運動)3으로 밀가루 소비가 강력하게 권장되면서 밀떡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1990년대 들어서면서 다시 쌀떡이 유행했지만 그렇다고 밀떡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일은 없었다.

원주의 떡볶이 성지, 자유시장 지하
60년 전통을 자랑하는 ‘자유시장’은 전후 미군부대로부터 흘러들어온 식료품과 옷가지들을 파는 난전에서 시작됐다.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칼국수 등의 분식을 파는 상인들 또한 점점 늘어났다. 1987년 시장 재건축 이후 난전 시절 모습은 사라졌지만 분식의 전통은 지하 ‘먹자골목’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원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시장 지하에 단골집이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상 어느 집으로 가든지 맛이 좋지만 일단 골목 입구에 발을 들여놓으면 늘 가던 그 집으로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인다.
매번 들를 때마다 정신없이 떡볶이를 입에 우겨넣느라 별 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 취재를 핑계 삼아 단골집의 역사를 여쭤보았다.



“우리 엄마가 자유시장에서 건어물 가게를 하셨거든. 거기 남는 자리에서 액세서리를 취급 하다가 분식으로 전향하게 된 거야. 그게 벌써 오래 전 일이네.” ‘ㅇㅈ집’은 올해로 개업 21년 차를 맞이한 베테랑 맛집이다. 그렇지만 이 정도 경력은 자유시장 지하에서는 명함 내밀기도 어렵단다. 이곳에 떡볶이 골목이 생겨난 것은 대략 35년 전 쯤으로 추정되는데, 이 무렵 장사를 시작했던 거의 대부분의 상인들이 여전히 성업 중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바(bar)형태의 좌석에서 사장님과 마주보고 음식을 먹는 구조 또한 골목이 형성되었을 때 그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더 줄까?” 접시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낼 때쯤 ‘ㅇㅈ집’ 사장님이 잊지 않고 묻는 말이다. 흘러넘치도록 떡볶이를 담아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라니, ‘이 맛에 여기 오지’ 싶어진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평일 오후인데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사장님의 푸근한 인심 덕분이기도 하지만 뭣보다 맛이 좋기 때문일것이다. ㅇㅈ집 떡볶이의 매력은 매콤달콤한 국물에 푹 적셔먹는 각종 튀김이다. 오징어튀 김, 김말이, 고구마튀김, 만두튀김 중 골라서 섞어먹을 수 있다. 한 입 가득 떡볶이를 채운뒤 뜨끈한 어묵국물 한 술 뜨면 세상 시름이다 사르르 녹는다. 손님 중에는 유독 아기를 데리고 온 젊은 엄마들이 많다. 대부분 학생때부터 여기에 다닌 단골들이다. “그럼~! 교복입고 다닐 때부터 봤는데 다 알지.” 오는 손님마다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장님의 모습은 언제 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경이다. 맛과 분위기를 복기하며 글을 적다보니 어느새 군침이 싹 돈다. 아, 부르다가 통통해질 그 이름, 자유시장 지하 떡볶이여…!



참고문헌
< 맛 얼 제2권 3호 : 조선시대 한글 음식 조리서로 본 전통 음식 조리법의 비교 - 떡볶이> (한국식품연구원, 2009)

< 맛 얼 제6권 2호 : 한국의 전통음식 떡볶이> (한국식품연구원, 2013)

<맛있고 재미있는 한식 이야기 : 떡볶이> (한식진흥원, 2013) 

<한국민속대백과사전 : 식생활 - 떡볶이> (한국민속대 백과사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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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준국어대사전.
2 크라운제과 홈페이지 ‘스낵의 유래’ (https://www.crown.co.kr/product/story_snack.asp)
3 1960~70년대 추진된 정부의 식생활 개선  정책. 소비량을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밥에 잡곡을 섞는 혼식(混食)과 밀가루 음식인 분식(粉食)을 장려했다.


​ 글 황진영 지역문화콘텐츠협동조합 스토리한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