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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에세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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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값이란 무엇인가


지난 명절의 일이다. 우리 집안 서열 최하위인 친척동생 A와 송편을 끝없이 빚으며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올해 대학 졸업을 앞둔 A는 취업이 고민이라고 했다. 그저 ‘잘 됐으면 좋겠다’ 정도로 반응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그만 입을 놀리고 말았다. “요새 세상에 평생직장이 어디 있겠어. 다니다 보면 또 그만두게 되고 그러더라. 그냥 너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생각해봐.” 간만에 누군가에게 참견할 기회가 생긴 나머지 신나게 나불대던 내게 A는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고 싶은 일이 없을 수도 있잖아.” 아차, 싶었다. 여태 아파야만, 흔들려야만 어른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꼰대짓을 했던 것이다. 조금 일찍 태어난 게 대체 무슨 자랑이라고 그랬을까. 부끄러워서 한동안 A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나 역시 언젠가 비슷한 얘길 들었던 적이 있다. 아주 길고 장황한 대화였지만 결론은 ‘나잇값’하라는 충고였다. 나이에 가격이 매겨지다니. 마치 매물이 된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의문으로 남았다. 나잇값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저 살아왔을 뿐인데 그 값은 누가 매기는 걸까. 한 때는 주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가족으로서, 친구로서 할 몫을 다하는 게 나잇값이라고 생각했다. 모자람 없이 살기 위해 꽤나 노력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나이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너무 전투적으로 철들지 마세요.’ 내가 무척 좋아하는 뮤지션이 어디에선가 한 말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아리송했는데, 지금은 깊이 와 닿는다.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나는 언젠가 어른이 된다. 여러모로 잃을 게 많아지고 속으로 사사건건 모든 일에 계산기를 두드리는 어른 말이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어떤 사람들은 아이처럼 웃고 저울질 없는 친절을 베풀며 행복의 방향을 정확히 알고 나아간다. 얼마나 일찍 태어났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나잇값 하라’는 무례한 요청이 있은 후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참으로 매일이 실수투성이다. A에게 그랬듯 꼰대처럼 굴기도 하고 차라리 화 한 번 냈으면 깔끔했을 일을 어른답지 못해 보일까봐 가짜 웃음으로 뭉개고 지나가기도 한다. 비록 불쾌한 경험이긴 했어도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만일 A가 다시 한 번 내게 기회를 준다면, 치열한 시기를 보내느라 축 쳐진 그의 어깨를 말없이 툭툭 두드려줄 것이다. 꼭 뭐라고 한 마디 보태야만 한다면 ‘스트레스 받아서 맛있는 거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라고 말할 것이다. 꼭 이렇게 나잇값도 못하고 다 지난 후에야 후회를 한다. 백 살 먹으면 사는 게 쉬워지려나.

 


 글 황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