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스토리


장일순의 평화사상 - 한국전통불교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12-18
첨부파일 조회수 4,722

|Ⅰ| 어느 철학자의 삶과 죽음
1994년 5월 24일자 한겨레신문에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민주화 헌신 재야원로 서예가 장일순씨 타계’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무위당 장일순은 평생 스스로 무직(無職)을 자처하면서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의 부고를 전하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대성학원의 설립자이자 교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교육자로, 의인란(擬人蘭)이라는 독자적인 서화의 영역을 개척한 당대의 서예가로, 생명운동을 제창하여 ‘더불어 함께 삶’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생명사상가로, 천주교를 수용하고 유불·선의 전통사상을 탐구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장일순은 1950년대 이래로 ‘중립화 평화통일이론’ 을 주장한 통일이론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펼친 공동체주의자이기도 했으며, 강단 중심의 한국 현대 지성사에서 함석헌과 함께 강단 밖의 공간에서 자신의 주장을펼쳤다는 점에서 지성사의 이단아로 불리기도 했다.
이처럼 그를 호명하는 지평이 한 마디로 아우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는 점에서 장일순이라는 인물이지녔던 사유의 폭과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무위당 장일순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그가 서예가였다는 점에서 그가 남긴 서화작품을 중심으로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화운동가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거나 환경운동가, 생명운동가로서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민주화운동을 음양으로 지원하면서 재야의 원로 구실을 해왔던 서예가 장일순씨가 22일 오후 6시 30분 강원도 원주시 봉산2동 929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83년부터 한살림운동 본부를 만들어 박재일씨, 김지하 시인 등과 함께 생명사상 실천운동에 전념해온 장씨는 20~30대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70년대 초 민청학련사건을 경험한 40대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장씨는 천주교를 우리 것으로 수용하고 유·불·선의 전통사상을 탐구하면서 ‘더불어 함께 삶’을 중시하는 생명사상으로 나아갔다. 서예가로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 6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그러나 그가 남긴 말과 글, 서화 작품, 나아가 사회적 실천에 함축되어 있는 일관된 사유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글은 드문 편이다. 그 때문에 이 글은 한국철학의 역사적 맥락을 중심으로 장일순의 사유가 어떤 점에서 한국의 전통적 사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고찰함으로써 장일순 사상의 기원을 체계적으로 밝히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평화사상가로서 장일순의 면모를 살펴봄으로써 현대 한국사회가당면하고 있는 극심한 분열과 대립, 갈등 따위의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Ⅱ| 장일순 평화사상의 형성 배경
❶ 장일순 사상 형성의 시대적 배경
장일순이 걸어간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학으로 한학을 익히고, 서예 스승인 박기정(1874~1949년)에게 서화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전통적 사유의 훈습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과정이 유·불·도와 동학 전반에 걸친 폭넓은 사유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짐작된다.

이후 장일순은
1950년대에는 교육자의 삶을 살았고, 60년대에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70년대에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삶을 바쳤고, 70년대 말부터는 생명 환경운동에 매진했다.
장일순의 이 같은 삶은 동시대를 살았던 교육자나 정치인 대부분이 강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아래 경제성장을 통해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했던 것과 비교할 때 크게 다를 뿐아니라, 거듭되는 독재정권의 억압 아래 투쟁 중심의 정치운동을 지속해 왔던 민주화 진영의 인사들과 비교해 볼 때도 참으로 특이한 행보였다. 장일순의 이 같은 특이한 삶과 사유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전통적 사유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가 남긴 말과 글, 서화 작품에는 기독교 뿐 아니라 동학은 물론이고 유교와 불교, 노자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전통 철학적 맥락이 보이기 때문이다.

❷ 장일순 사상의 철학사적 배경
필자는 졸고 『한국철학사』에서 장일순의 사유를 다음과 같이정리하고 평가한 바 있다.
장일순의 사유는 “좁쌀 한 알에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라고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하나가 곧 전체’라는 화엄 불교의 세계관과 일치할 뿐 아니라, 아무리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똑같은 인간으로 대했다는 점에서 “한 사람의 가치가 천하와 맞먹는다”고 이야기한 맹자의 정의론(正義論)과 상통하며, 나서서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에게 ‘엎드려!’와 ‘기어!’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물러남을 중시한 노장(老莊)의 철학과이어져 있다.
이 같은 정리에 따라 먼저 원효의 화쟁론과 의상의 화엄철학이 어떻게 장일순의 사유와 맞닿아 있는지 살펴보고 이어서 통일과 평화 등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의 문제에 대한 그의 이해를 분석함으로써 장일순 사상의 일단을 밝혀보고자 한다.



① 원효의 화쟁론(和諍論)과 장일순의 평화사상
원효(元曉, 617~686)는 동아시아 불교사에 빛나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과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를 비롯한 숱한 명저를 남긴 불교 철학자로 그의 핵심 사상은 ‘화쟁(和諍)’이라는 두 글자로 압축할 수 있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통일신라라는 배경에서 탄생한 화해의 철학이다.
원효가 활동했던 즈음은 신라의 26대 진평왕(재위 579~632)부터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에 이르는 6대에 걸친 시기로, 신라는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재위기간인 675년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불완전하지만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통일신라는 이전에 서로 적대시하던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 그리고 신라인들이 함께 섞여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숱한 국가적 과제를 떠안고 있었고, 그로 인한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대립 분열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시기에 원효의 화쟁론은 단순히 불교 내의 이론적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적 차원의 조정에 그치지 않고, 통일신라가 당면했던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제시된 사회 통합 이론이기도 하다. 곧 화쟁론은 과거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던 다수의 구성원들이 평화롭게 살기 위한 방법을 철학적으로 모색한 결과이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사회의 분열이 극심할 때마다 ‘화쟁’을 화두로 삼아 논의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한국철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평화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의 화쟁론은 한 마디로 온갖 쟁론을 화해시키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화쟁(和諍)’이라는 말은 일체의 쟁론을 화해시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화쟁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데, 먼저, ‘화(和)’는 화합, 통합한다는 뜻이고, ‘쟁(諍)’은 말로 다투는 것이다. 따라서 화쟁은 쟁(諍)을 화(和)한다는 뜻으로 온갖 논쟁을 화해시키는 논리를 말한다.
한편 화쟁의 ‘화(和)’와 ‘쟁(諍)’ 자체가 상반되는 뜻이다. ‘화(和)’는 평화의 상태이고 ‘쟁(諍)’은 분쟁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화’는 분쟁을 평화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이고 쟁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상태인 것처럼 보이지만 원효는 ‘화’조차도 ‘쟁’의 다양한 모습중 하나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원효는 여기서 더 나아가 ‘화’ 와 ‘쟁’ 자체는 대립되지만 ‘화’와 ‘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진리를 찾기 위한 방편이라는 논리를 이끌어낸다.
원효는 화쟁을 이루기 위해 ‘개합(開合)’, ‘여탈(與奪)’, ‘입파(立破)’의 세 가지 방편을 제시한다. 먼저, 개합(開合)에서 ‘개(開)’는 여는 것, ‘합(合)’은 합치는 것, 곧 닫는 것이다. 원효는 이 둘을 합쳐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개’는 하나의 불법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치는 것이고 ‘합’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쳐진 불법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한다. 상반되는 두 가지 주장이 사실은 불법의 한 방편으로 모두 진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탈도 같은 논리로 풀이한다. ‘여(與)’는 주는 것이고 ‘탈(奪)’은 빼앗는 것이다. 주는 것과 빼앗는 것이 상반된 것 같지만 사실은 주는 것이 빼앗는 것이고 빼앗는 것이 주는 것이라는 논리다. 입파 또한 마찬가지다. ‘입(立)’은 세우는 것이고 ‘파(破)’는 깨는 것이다. 자기가 세운 논리를 자기가 깨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를 철저하게 반성하는 화쟁의 통찰이 가능했던 것이다.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사회 분열이 심각해지면 종종 원효의 화쟁론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서로의 이익을 다투는 입장을 지키는 한 화쟁의 길은 멀기만 하다. 이익을 다투는 사람들 간에 몫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합당한지, 그에 대한 합의는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화쟁을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화쟁을 위해서는 먼저 상반되는 주장을 살피기 위해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인내를 넘어 상대를 포용하고 용서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원효의 화쟁론은 신라가 불완전한 통일을 이룬 뒤 고구려, 백제 유민들과 함께 살아야했던 시대배경에서 탄생한 평화의 철학이다. 그런데 20세기 평화사상가 장일순의 사유에서도 같은 맥락을 찾아볼 수 있다. 장일순 또한 독재와 민주로 나뉘어 서로를 적대시하며 싸우던 현대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구성원들이 증오심을 넘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동일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상대를 적대시 하고, 악으로 규정하면 할수록 그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기 어렵게 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호를 풀이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내 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좀 길어. 나는 이십 대에 백두산 천지란 뜻이 있는 호암이란 자호를 썼지. 자네들이 알고 있는 청강(淸江)이란 호는 내 나이 서른일곱에 붙인 호야. 그 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나로서는 핍박의 시대에 있어서의한 원한 관계 같은 거였지. 그러나 그 원한 관계를 원한으로만 생각하면 안 돼. 그렇게 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고 추해져. 그래서 나를 핍박하고 욕되게 했던 이들까지도 사랑하자는 뜻에서 ‘푸른 강’이라고 지은 거지. 미운 감정을 푸른 물에 씻자는 것이었어.
지난 이야기 같지만 난 지금 그들을 사랑해. 그러니까 내 자신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호가 해준 셈이야. 가정에서 말하면 가훈(家訓)이고 장일순 나에겐 ‘장일순훈(張壹淳訓)’인셈이지.¹⁾

이처럼 그는 자신을 탄압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악으로 지목한 독재자를 용서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심지어 민주화의 선봉에 서 있었던 사람들에게 “가서 엎드려 기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그는 무엇보다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확신을 경계했다. 아무리 스스로 정의라고 확신하더라도 우리는 정의의 세력이고 저들은 악의세력이라는 식으로 편을 갈라서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독재정권 타도를 민주화 운동의 제1가치로 내세우는 시대의 한 가운데서 적대세력을 용서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화쟁의 현대적 실천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② 의상의 화엄철학과 장일순의 평화사상
의상(義湘, 625~702)은 중국에 유학하여 화엄의 2대 조사였던 지엄에게 화엄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정통 불교철학자로 파격적 주장과 기행으로 불법을 전파했던 원효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화엄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동일한 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유에는 모두 화해의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의상은 화엄 철학의 근간이 되는 『화엄경』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자신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는 당시 당나라를 비롯해 국제적으로 유행하던 화엄 철학을 통해 자신이 당면했던 현실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의상의 저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다. 이 글은 80권이 넘는 『화엄경』을 7언(言) 30구(句) 210자(字)로 간명하게 풀이한 일종의 게송(偈頌)으로 의상이 제시하는 통합의 논리가 담겨 있다. 이중에서 의상의 사유를 살펴보는 데 가장 중요한 게송이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다[一卽一切多卽一]’라는 대목이다. 해당 문구가 나오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네 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티끌에 온 세상(시방세계) 머금었으니 一切塵中亦如是 온갖 티끌이 다 이와 같다네 無量遠劫卽一念 셀 수 없는 무량겁(헤아릴 수 없이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의 흐름)이 한 생각에 지나지 않고 一念卽是無量劫 한 생각이 바로 셀 수 없는 무량겁이라²⁾

우리는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 그 사물의 크고 작음,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구분한다. 그러나 그런 차이는 다른 사물과 비교할 때 생기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는 본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농구공과 지구는 얼핏 보기에 전혀 상관이 없는 물건처럼 보이지만 구형이라는 점에서 같은 종류다. 또 선인과 악인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실은 서로 만날 때 비로소 선인과 악인으로 나누는 구분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단독으로는 선인도 악인도 될 수 없다. 일(一)과 십(十)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일과 십이 있으면 일도 자기 정체성이 있고 십도 자기정체성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일과 십이 서로 만나야, 곧 연기(緣起)를 통해서만 의미가 생성된다. 말하자면 일은 단독으로는 의미가 없고 십이 있어야 의미를 지니고, 십은 일의 열 배이기 때문에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결국 십이 없으면 일이 의미가 없고, 일이 없으면 십도 의미가 없다. 곧 일과 십은 같다. 이것이 바로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각자의 자성이 따로 없고 다른 사물을 만날 때만 자성이 확인된다는 의상의 법계연기설이다.

의상은 이런 사유를 거쳐서 마침내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다’라는 유명한 통찰을 이끌어낸다. 이어지는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은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 있으므로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라는 뜻으로 『화엄경』 전체의 핵심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의상은 더 나아가 이 명제를 시공간적 지평에서 바라본다. 먼저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는 구절은 공간적 지평에서 하나와 전체의 관계를 정리하는 언명이다. 곧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인 하나의 티끌에 온 세상 전체가 모두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티끌이 다 그러하다고 풀이한 것이다.
티끌 하나에 온 우주의 이치가 있다는 말은 온 우주의 이치가티끌 하나하나에 다 들어 있다는 이야기다. 공간적 지평에서 사물을 이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면 시간 또한 마찬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티끌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면 찰나의 순간에 영원이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상은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라고 하여 영원의 시간이 일념의 짧은 시간과 같다고 이야기한 다음 다시 일념의 짧은 시간이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량겁과 같다고 마무리한다.
화엄철학의 이 같은 통찰은 장일순의 사유에서도 발견된다. 장일순은 “세상 일체가 하나의 관계다.”라는 말을 자주했는데, 이 또한 기본적으로 의상의 법계연기설과 닮은 꼴 사유라는 점에서 화엄철학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그가 한살림 운동을 펼치면서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데서 동일한 사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모두 소비자인데 농사짓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가 먹고 살 수 있어요? 또 소비자가 없으면 농사꾼이 생산할 수 있어요? 바로 그런 관계다 이 말이야. 이게 없으면 저게 없고, 이게 있으면 저게 있고 우주의 모든 질서는, 사회적인 조건은 그렇게 돼 있다 이 말이야. 그러니 누구를 무시하고 누구를 홀대할 수 있느냐는 말이지.³⁾
여기서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는 이익추구를 근간으로 형성되는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의 한계를 넘어 상대의 존재가 곧 자기생존의 근거임을 확인하는 공존의 양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장일순의 소비자와 생산자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소비자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소비자와 생산자의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하는 공존의 양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생산자가 없으면 소비자도 없고 소비자가 없으면 생산자도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의상의 법계연기설과 같은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엄철학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일순은 이런 사유를 통해 온 우주의 사물을 다음과 같이 바라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해월 선생님의 말씀 중에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지려면 거기에 우주 일체가 참여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어.
우주 만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빠져도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질 수 없다 이거야. 밥 한 그릇이 곧 우주라는 얘기도 되지. 잡곡밥 한 그릇, 김치 한 보시기 같은 소박한 밥상도 전우주가 참여해서 차려 올리는 밥상이라는 거야.
장일순은 자신을 ‘조 한 알’이라고 부르며 “좁쌀 한 알에 우주가 담겨 있다”고 자주 이야기했는데 이 또한 의상의 화엄철학에 보이는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이라는 체계 속에서 이해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찰나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영원과 맞닿아 있고,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온 우주와 대면하는 일이다. 사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찮은 사물 하나하나를 만날 때마다 온 우주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Ⅲ| 통일과 평화의 시각에서 본 장일순 사상의
핵심과 특징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장일순의 사유에는 한국 불교 전통의 화쟁론과 화엄철학이 깔려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장일순은 자신의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통적 사유 속에 깔려 있는 오래된 통찰을 현대 한국 사회의 맥락에 맞게 재해석하여 실천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평화사상을 살펴보는 일은 현대 한국이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잖은 시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 평화의 가치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정치적 공간이다. 우리는 아직 민족의 분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온갖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 공존이 고착화되어 가는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분단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할 것도 없이 통일이다. 하지만 현재 통일에 관한한 한국사회의 정서는 장일순이 생존했던 시대에 견주어도 퇴행적이다. 장일순의 시대에는 방법은 달랐을지라도 분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의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은 진영을 떠나 이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통일은 절대적인 명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장일순은 일찍이 이런 상황의 도래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더러 통일운동 하는 사람들이 온단 말씀이야. 그래서 내가 자네들 통일운동을 북쪽하고 하는 건가? 하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자네들 국민하고도 통일운동을 제대로 못하면서 무얼 북쪽하고 통일운동을해? 또 나아가서 남한 내부가 지역감정으로 갈가리 찢어져 있는데 그 이해관계도 감정적으로 골이 깊은데, 그런 통일운동도 못하면서 뭐 어디하고 통일운동을 해? 나는 이해가안 돼.⁴⁾
장일순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내부의 대립과 갈등부터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컨대 한국사회가 진영의 논리에 매달려 있는 한 통일의 길은 멀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내부의 지역감정이나 진영논리를 넘어 적대적 관계를 해소할 때 비로소 참된 의미의 통일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는 그가 분단의 원인을 외부 세력의 개입 탓으로만 돌리지 않는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미국이나 소련, 그리고 그네들 욕심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남북이 스스로 내왕하고 우리 전통, 우리 살던 방식대로 살겠다고 했더라면 분단이 되었겠어요? 안 되었을 거란 말이에요.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전통, 우리 사는 방식을 너무도 무시해왔어요.
하지만 이것은 비단 우리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그런 형편이죠. 한마디로 주판을 잘못 놓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주판을 잘못 놓게 되면 완전히 털어버리고 다시 놓아야지요.⁵⁾

장일순의 이 같은 통일관은, 한반도 분단은 외세의 개입보다 내부의 분열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중시한 합리적 주장이다. 물론 한반도의 분단은 외세의 개입이 작용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세가 개입하게 된 근본적 원인은 내부에 있고, 지도자들이 직면했던 민족의 여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했기 때문에 분단의 비극을 초래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장일순은 통일 문제를 이야기할 때 늘 “소련이나 동구라파가 써먹던 방법, 미국이 써먹던 방법을 가지고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분단의 원인을 전적으로 외세에 돌린다면 통일 또한 외세의존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장일순의 이 같은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장일순은 통일을 한반도에 국한된 문제로만 보지는 않았다.
한반도 내부의 그 동안의 역사적인 환경 내지는 조건 속에서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이 한반도는 세계 속에 있어서의 한반도이고 전 우주 속에 있어서의 한반도다 말이야. 그럼 이제는 문명에 대한 반성과 문명이 우리에게 갖다 준 결과가 뭐를 가져오고 있느냐? 그것 속에서 우리 삶에 대해서 땅바닥서부터 다시 정착시켜가는 그런 시기여야 된단 말이야.⁶⁾

여기서 장일순은 한반도를 전 우주 안의 한반도로 보고, 작은 마을의 일을 전 세계, 전 우주의 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분단의 근본적 원인을 내부의 분열에서 찾는 장일순이 한반도의 문제를 한반도만의 문제로 보지 않는 통찰에 도달한 것은 그가 깊이 이해하고 있는 화엄철학을 통일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용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장일순은 통일의 목적을 국가적 가치에 국한시켜 이해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통일을 국가 이익 내지는 국민국가 형태의 이익만 가지고 밀어 붙여서는,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는 이 상황 속에서 그건 효과가 없게 될 걸세. 문제는 이 땅과 그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어떻게 제대로 처리해 가는 것이 중요하냐는 문제야(…) 남북의 통일문제도 생명에 대한 생각을 구축하는 속에서 얘기가 돼야지. 이것을 국민국가의 어떤 힘만 가지고 힘의 조정만 가지고 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아무리작은 한 마을의 일이라고 하다라도 그건 전 세계의 일이요.
전 우주의 일 아닙니까.⁷⁾

이처럼 장일순은 남북의 통일 문제 또한 하나의 민족이나 한 국가의 이익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와 온 우주의 생명을 살리는 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했다. 이 또한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화엄철학의 논리를 현실에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Ⅳ| 장일순의 사상이 한국사회에 주는 교훈
장일순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의 적대세력을 포용하고 대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서 적대세력을 철학자들이 쓰는 말로 바꾸면 ‘타자(他者)’가 될 것이다. 타자란 단순히 나 아닌 타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나와 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른 사람, 그래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장일순의 일화 중에는 그런 타자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풀어가야 하는지 시사해주는 이야기가 많다.
도둑을 만나면 도둑이 돼서 얘기를 나눠야 해. 도둑은 절대샌님 말을 안 듣거든. 뭐냐 하면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도둑이다 싶으면 그때부터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이 말이야. 그때 도둑질을 하려면 없는 사람 것 한두 푼 훔치려 하지 말고 있는 사람 것 털고, 그것도 없는 사람과 나눠 쓰면 좋지 않겠냐고 하면 알아듣는다. 부처님은 마흔네 개의 얼굴을 갖고 계시다는 말이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지.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이 말이야.⁸⁾

여기서 도둑은 타자의 다른 이름이다. 이 이야기는 그런 타자 또는 적대자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효의 화쟁론과 닮은꼴이다. 화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식의 자의식을 넘어 상대와 온전히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처지를 내려놓고 상대를 이루어 주는 과정이 있어야 함께 할 수 있다. 일찍이 리영희는 장일순을 두고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다.
내가 일면적이고 평면적인 사고나 사상과 정서로 인간적 포용력을 못 가진 데 비하여 그 분(장일순)은 다면적이고 복합적이고도 중층적이면서 아무 모순 없이 이질적으로 보이는 제반 사상들을 하나의 커다란 용광로처럼 융화시켜 나가는 분이었어요. 그 인간의 크기에 압도되지(…) 그분의 생활양식은 노자적이면서 불교적이고, 오히려 비기독교적이라 볼 수 있었어요. 그 분의 생활양식은 가톨릭의 규율이나 범주에는 전혀 매이지 않았어요. 어느 이념이나 종파에도 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⁹⁾

장일순은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기독교 계열 사상가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리영희의 이 회고에 따르면 그는 가톨릭의 규율이나 범주는 물론이고 어느 이념이나 종파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장일순은 자신을 탄압한 독재자라는 커다란 악과 시골 아낙네의 혼수 돈을 훔친 길거리의 소매치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삶을 단순히 ‘탈이념’이나 ‘탈정치’의 결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생명과 평화라는 가장 큰 이념 가장 큰 정치를 지향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글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