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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에세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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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특식



아무래도 날씨는 구실일 뿐이다. 괜스레 멋진 생활문화를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핑계를 댄다. '비 오는 날엔 역시 OOO이지!' 취향은 의외로 집집마다 다양하다. 우리집은 애호박을 듬뿍 썰어 넣은 수제비가 대세고, 또 어떤 집에 가면 빗방울 떨어지기 무섭게 신김치 쫑쫑 썰어 부침개 채비를 한다. 이쯤 되면 <한국의 음식문화 : 기후와의 상관관계>, <강우량과 밀가루 소비 매커니즘연구>같은 논문도 나올 법하다.
요즘 장마는 차라리 우기에 가깝다. 며칠 째 침침한 하늘과 물기어린 바람이 짜증을 돋운다. 무슨 변덕인지 꼭 우산 없을 때만 골라 장대비가 내린다. 애써 챙겨나간 우산은 건조한 몰골로 나를 비웃기 일쑤다. ‘네가 감히 기상예보를 믿어?’불쾌지수에도 만점이 있을까. 쓸데없이 비공식 기록 갱신에 욕심이 생기는 날엔나는 액상과당을 들이붓는다. 주로 단골 카페의 초코라떼다. 혈관 건강은 훼손될지 몰라도 영혼이 회복된다. 설탕만세.
비 오면 입맛 돋는다. 많이 내릴수록 그렇다. 얼큰한 짬뽕에 탕수육이 간절해지고 바삭하게 테두리를 튀겨낸 파전 한 접시도 떠오른다. 음식은 맛으로만 먹는게 아니다. 조리과정까지 모두 식사에 포함된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 피어나는 수증기, 코를 찌르는 향기 모두 중요한 요소다. 비 소식에 덩달아 솟구치는 식욕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자욱한 비구름, 훅올라오는 흙냄새…. 식탐을 굳이 설명하자니 자꾸만 장황해진다. 어쩔 수 없다.
창궐하는 전염병에, 흉흉한 소식으로 번번이 시끄러운 나날이지만 한편으론 우리에겐 이런 낭만이 아직 남았다. 정말이지 다행이다.​

글 이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