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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 이야기 [16] - 저성장 시대를 뛰어 넘는 협동조합운동의 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6-24
첨부파일 무위당_장일순.jpg 조회수 1,627

‘만물을 알뜰하게 모시고 이웃과 나누라'



스피노자의 책상

원주에는 내가 좋아하는 북까페가 있다.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그 까페는 정원의 작은 화분으로부터 화장실까지 주인장의 안목에 감탄할 정도로 아름답고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다. 하지만 내가 그 까페를 좋아하는 까닭은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작은 목조 책상 때문이다. 그 책상을 보자마자 난 ‘이건 스피노자의 책상이야’라고 생각했고, 더운 여름날 서울에서 원주의 그 까페까지 찾아가 글쓰기를 한 적도 있다. 

스피노자의 책상은 그 철학자의 검소한 삶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평생 안경의 렌즈깍기 노동으​로 자신의 밥벌이를 한 그가 죽을 때 남겨진 것들은 그가 그 집에 들어올 때와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집에 있는 가구란 덩그마니 놓여 있는 책상 하나. 거기서 일평생 렌즈를 깎고 글을 썼던 것이다. 그러하니 그 책상은 그의 지상의 양식을 얻기 위한 노동의 공간이자 영혼의 양식을 얻기 위한 철학의 공간이었다. 

살아생전에도 그는 묽은 죽과 거친 빵을 먹으면서도 그렇게 행복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내가 스피노자의 삶에 매혹된 까닭은 그의 그 극단적인 검소한 생활 때문이 아니다. 그는 낭만을 알았고 풍류를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홀로 있을 땐 지극히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면서도 한 달에 한 번 1파인트의 포도주를 마시며 친구들과 잔치를 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멀건 죽에 딱딱한 빵을 먹으며 밤낮으로 렌즈를 깎고 글만 썼다면 그는 매력적인 철학자로 보이기는커녕 지지리 궁상맞고 독한 학자의 이미지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위대했을지 몰라도 그의 삶은 외롭고 가난했기에 그의 철학을 삶의 철학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진정 삶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임에 틀림없다. 자신의 노동으로 돈을 벌고, 아껴 둔 술과 음식으로 친구들과 잔치를 벌이고, 애써 읽고 생각하고 쓴 철학은 친구들과 공부하며 나누었다. 그러하기에 그의 삶은 참으로 소박하고 검소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의 삶보다도 풍성하고 흥겨웠으리라. 그래야 한다. 삶은 풍성하고 흥겨운 것이어야 한다. 

 

‘만물을 알뜰하게 모시고 이웃과 나누라’ 

나는 스피노자보다도 훨씬 나중에 살았던 원주의 사람 장일순선생의 말씀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보았다. 아니 어쩌면 장일순선생의 말씀을 읽고 스피노자의 삶을 더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이 엮은 책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에서 선생이 생전에 강연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세상 일체가 하나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정리된 이 글에서 선생은 한살림운동을 하면서 꼭 지녀야 할 세 가지 마음인 자애, 검약, 겸손에 대해 들려주셨다.

그 중 두 번째인 검약에 대해서 노자의 문구를 이용하시며 바로 스피노자의 그 정신을 일깨우는 지혜를 말씀해주셨다.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알뜰함만한 게 없다’ 했어요. 그 얘기는 뭐냐. 우리가 농사지은 거, 그리고 모든 물건을 알뜰히 해서 소중히 쓰면 많은 사람에게 베풀 수 있어요. 알뜰하게 해야 남는 것을 주지. 하늘과 땅과 만물의 도움으로 생긴 물건​을 알뜰하게 모시고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게 바로 한살림의 정신이에요”.

소비를 관장하는 협동조합을 하면서 검약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니! 이 무슨 모순어법인가 싶을 것이다. ‘장사는 이문을 남겨야 하고, 그러려면 많이 팔아야 할텐데 검소하고 아끼라고 하다니, 도대체 장사를 하자는 얘기야 말자는 얘기야? 그렇게 할거면 철학하지 장사는 왜 해?’ 이렇게 세상물정 모르는 선비의 말이라 치부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일순선생의 그 말씀은 바로 왜 같은 장사라도 주식회사가 아니라 협동조합으로 하는지, 왜 돈 있는 자본가가 아니라 소비자가 나서야 하는지를 한마디로 정리해 주고 있다. 게다가 지금처럼 저성장시대라고 모두가 걱정하는 이 시기에, 사회적 불평등과 생태위기에 더하여 기후위기로 미래가 암담한 이 시기에 협동조합은 어떻게 장사해야 하는지 그 길을 알려주신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운동은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소유하고, 끊임없이 성장해서 무한정 팽창하기 위한 공격적인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없이 올라가고 뻗어나가 통제가 안 되는 운동, 끝없이 경쟁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봉착하는 운동, 무한정 파헤치고 써버리다가 바닥이 나는 운동, 그렇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질주하는 운동이 아니다. 

협동조합운동은 물질이 무한정하지 않다는 조건을 인식하고 스스로 조절하며 제한하는 운동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을 생산하고, 필요한 만큼 사용하며, 쓴 만큼 다시 자연으로 돌려주어 순환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생활양식을 반영한 사회운동이 서구에서는 ‘탈성장(décroissance)’, 혹은 ‘자율공생(convivialism)’으로, 남미에서는 ‘부엔 비비르(Buen Vivir) 혹은 비비르 비엔(Vivir Bien)’이라는 이름의 대안운동으로 탄생하여 퍼져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 세 운동의 공통점은 놀랍게도 무위당선생의 말씀과도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탈성장은 검소한 풍요로움과 자발적인 소박함을 삶의 양식으로 제안하며, 자율공생운동은 검소하면서도 잘 어울리며 함께 즐기는 삶을 지향한다. 부엔 비비르는 볼리비아의 원주민 아이마라족의 ‘수마 카마나’, 에콰도르의 케추아족의 ‘수막 카우사이’라는 표현으로 존재했었다. 그 뜻은 조화로운 삶, 숭고한 삶, 혹은 내적인 평화를 가지는 삶으로 풀이된다. 부엔 비비르는 스페인어로 번역된 표현인데 원어를 직역하면 ‘잘 살기’, 즉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담고 있는 삶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구와 남미의 새로운 삶의 운동이자 대안 사상은 장일순 선생의 문장에서 이리도 훌륭하게 종합된다.

“알뜰함이란 인색하게 나만 갖는 거하곤 달라요. 마땅히 좋은 데에 베풀기 위해서 소중히 다룰 줄 아는 거지.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이런 겸손의 토대 위에서 세상을 넉넉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거예요. 

알뜰함으로 세상에 누구도 굶주리지 않게 하고, 자애 속에서 잘못한 사람조차 안식처를 찾도록 하자는 게 한살림 정신인거라.”

 

 

협동조합운동의 회향(廻向)을 위한 전제 ‘성장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새로운 협동조합운동의 길을 제안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본론에 앞서 스피노자부터 장일순선생의 이름을 빌려 길게 말한 까닭은 협동조합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 없이 지금 겪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극복이나 개선이라는 용어가 아닌 회향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회향은 본디의 자리로 다시 돌아감, 혹은 새로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전의 것이 있다 하더라도 관성의 법칙에 따라 계속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짧게는 200년, 길게는 300년 정도 되는 전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 때문에 엇나갔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엇나간 이유를 바로 성장의 신화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방향이 아닌 것을 나침판삼아 갔기에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는 데는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여,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밝은 빛을 비추어 그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면 될 일이다. 그 빛을 비추는 등대가 스피노자의 책상이며, 장일순 선생의 말씀이다. 되돌아갈 곳이 어둡고 힘든 과거가 아니라 즐겁고 풍요로운 미래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안심하고 돌아가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엇나갔던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몸이 익숙한 옛날로 돌아가려해도 정신이 그러면 안 된다고 붙잡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의식의 각성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탈성장이론의 기수인 세르쥬 라뚜쉬(Serge Latouche)는 탈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식의 탈식민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즉 ‘머리에 망치가 있으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고 했듯이, 의식이 성장의 신화에 갇혀있으면 실천도 그 신화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머리 속의 망치를 꺼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머리 속 망치 꺼내기

애초에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경제는 성장이 아닌 스스로 제한하고 조절하는 탈성장운동이었다. 탈성장은 성장의 신화에서 해방되자는 사상이자 실천 운동이다. 탈성장을 주장하는 주요 이론가인 세르쥬 라뚜쉬(Serge Latouche)는 ‘성장’이라는 것이 신화가 되어 우리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되었기 때문에 우리 의식이 마비되었다고 보았다. 그 상태를 그는 ‘의식의 식민지화’라고 규정했고, 그래서 성장의 신화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의식의 탈식민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성장은 신화가 되었고, 왜 우리는 그 신화에서 해방되어야 할까? 

신화는 한 사회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이자 이념이다. 모든 나라는 건국신화가 있고, 부족사회 또한 신화가 존재한다. 신화는 사회집단의 구성원들의 공통의 이념으로 자리하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하기에 신성하고, 그러하므로 함부로 해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 된다. 경제성장은 국내총생산(GDP)이라는 지표로 표현된다. 성장이 신화가 되었다는 뜻은 GDP를 맹신한다는 뜻이다. GDP가 올라가면 경제의 상태가 좋은 것이고, 내려가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활동의 목표는 GDP를 높이는 것이 된다. 온 국민이 GDP 상승이라는 하나의 목표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장은 언제부터 신화가 되었나? 시작은 18세기 후반, 정치경제학을 정립한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國富論)’을 발간하며 정치경제학계를 평정하면서부터이다. 당시 경제의 목적은 ‘어떻게 부를 창출할 것인가’였고, 그의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정치경제학이라는 학문이 한 나라의 부의 총량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 부의 총량의 현재적 표현이 GDP이다. 

각 나라별로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했는지 지표를 만들고, 그 지표가 한 나라의 발전 정도를 나타내주는 기준이 된 것이다. 그래서 경제의 성공과 실패는 이 GDP의 오르내림과 상승이나 하락의 폭으로 설명하고 해석한다. 

그런데 잘 사는 나라에도 노숙자와 빈곤층은 없어지지 않고 불평등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시골엔 노숙자가 없는데 풍요한 도시엔 노숙자를 비롯해 일정한 주거가 없이 떠도는 이들이 허다하다. 대표적인 복지국가로 알려진 스웨덴의 수도 오슬로에도 노숙자들이 있다. 중국의 GDP는 매년 엄청나게 상승하는 동시에 매년 엄청난 수의 중국인들이 유럽과 아메리카대륙으로 떠나​불법체류자가 된다. 한국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지만 몇 년 째 임금은 올라가지 않고, 추가근로 수당을 받지 못하고 갑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넘쳐난다. 심지어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등 대기업의 노동자들도 갑질에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며 노동하는 것이 현실이다.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경제가 탄생한 까닭은 바로 이러한 정치경제학이 가지는 모순을 비판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서이다. 초기 사회적경제의 큰 사상가 중 한명인 샤를르 지드(Charles Gide)는 사회적경제가 탄생한 까닭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치경제학이라는)저 눈부신 학문은 어떻게 부를 창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그 부를 만드는 과정에서 겪는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고(Gueslin, 1997). 

그러니까 정치경제학이 총력을 다해 부의 총량을 늘리자고 주장한 학문이라면 사회적경제는 그렇게 부를 늘리는 과정에서 사람이 겪는 고통은 왜 외면했느냐는 문제를 제기하며 등장한 학문이다. 김상봉은 다음과 같이 사회적경제의 존재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세상에 고통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고통에 대해 말을 건네는 게 철학이고, 그 고통을 반추하는 게 문학이겠죠. 어디 인문학뿐이겠습니까? 경제학도 마주하고 있는 고통이 있습니다. 경제학의 과제가 부를 연구하는 거라고 한다면 그건 틀린 소리지요! 경제학이 마주하는 건 바로 가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입니다. 의학은 육체적 고통, 법학과 정치학은 불의라는 고통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1)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굶주림과 빈곤 등 사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학문이다. 그런데 그 학문은 오히려 부를 위해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고, 오로지 부만 바라보게 함으로써 존재 이유가 비판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탈성장이라는 담론은 그 용어가 탄생하기 전, 이미 자본주의의 초기부터 사회적경제라는 학문에 의해 제기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탈성장이란 발전을 멈추고 퇴보하자는 것이 아니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탈성장은 성장을 맹신하지 말자는 운동이며, 따라서 GDP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탈GDP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라뚜쉬는 탈성장프로젝트가 ‘다른 사회’의 건설, 즉 검소한 풍요의 사회, 성장없는 번영의 사회(Tim Jackson)를 건설하는 것이라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대안적 프로젝트를 아우르는 담론이라고 했다(Latouche, 2015). 


주판알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다시 놓을 때
기술하였듯 사회적경제는 사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새로운 학문이다. 사회적경제를 구성하는 협동조합운동 또한 사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협동조합의 역사에서 최초의 협동조합은 영국의 런던에서 대형화재의 참사를 겪은 후, 이에 대비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협동조합 운영원리의 초석을 다진 로치데일의 공정개척자회를 설립한 노동자들의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 이들은 섬유산업 경기가 한참 좋은 시절,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고통을 받으며 더 이상 노예처럼 일하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공장을 뛰쳐나와 자신들의 협동조합을 만든 것이다. 이렇듯 협동조합운동의 역사는 협동조합인들이 항상 시대와 사회가 만든 고통에 직면하여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결사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경제가 문제없고, 모두가 살만 하며, 일반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문제없다면 왜 협동조합이라는 다른 기업방식을 모색했었겠는가? 그러니 어쩌면 협동조합의 토양은 고통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생명이 고통 없이 탄생하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하다면 현재 협동조합이 겪는 어려움을 저성장이라는 시대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갑자기 경기가 나빠지고 불황이 찾아온다면 협동조합 또한 그 여파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들이 호황을 거치고 나서 이미 저성장시기로 접어든 것을 보며, 그것이 우리에게도 곧 닥칠 문제라는 것은 예견되었었다. 

세계는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금융자본주의로 전환하며 실질경제가 쇠퇴했고, 70년대 초 오일쇼크로 인하여 시작된 생태위기는 더 이상 자연자원의 무분별한 채굴로 성장의 동력을 삼을 수 없음을 경고한 바 있다. 그러니 저성장이라는 시기는 당연히 도래할 현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앞서 성장주의 또한 신화라 했듯이 저성장이라는 지표 또한 많은 것을 숨기는 허구적인 현실 진단인 측면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많은 협동조합들이 겪는 어려움을 저성장이라는 지표에서 찾는 것은 올바른 협동조합운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적절한 진단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간단히 소개할 사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프랑스의 비오쿱(Biocoop)은 실업이 만연하고 저성장으로 접어든 시기에 설립되어 지속적인 성장을 거두었다. 협동노동의 협동조합 라루브(La Louve)의 모델이 된 미국의 파크슬로프푸드쿱(Park Slope Food Coop) 또한 오일쇼크가 시작된 1973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생협을 비롯한 많은 협동조합들이 겪는 어려움은 사회경제적인 조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협동조합이 협동조합답게 운영되지 않는 경영의 위기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 많은 협동조합은 주인노릇하지 않는 조합원, 임금노동자의 노동에 의지한 조합의 운영, 경제적 참여를 하지 않는 조합원으로 인한 자본 부족, 노사 갈등 문제 등 참다운 협동조합운동의 노선을 많이 벗어난 상태이다.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에서 레이들로 박사가 언급한 신뢰의 위기, 경영의 위기, 이념의 위기를 한꺼번에 겪고 있는 셈이다.2) 그리고 그 본질은 협동적 관계에 기반한 협동적 조직 운영의 미숙함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협동조합의 근원적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나는 오래 전부터 협동조합의 강점인 협동의 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휘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 현장을 조사하고 연구해왔다. 그 연구의 일차적인 성과는 협동조합에서 말하는 협동의 범주를 노동, 자본, 생각 이라는 세 가지 협동으로 구분한 것이다. 이 세 가지 협동이 제대로 되어야 그 총체로서 협동조합이 운영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째 중요한 질문은 협동이란 자발적인 것이기에 누가 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닌 아주 주관적인 동기, 즉 내적인 동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협동의 방법을 제시하기 이전에 그 방법을 실천할 동기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협동의 동기가 만들어질까? 그러기 위해서는 협동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 그리하여 협동에 대해 늘 생각할 뿐 아니라 깊이 생각하는 훈련을 일상적으로 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길을 안내할 질문을 조직했다. 그 세 가지 질문은 ‘무엇을 협동할 것인가, 어떻게 협동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조합원이 주인노릇을 하게 할 것인가’이다.3)

이 연구 과정의 세 번째 단계는 위 세 가지 범주의 협동과 세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강력한 협동의 힘을 발휘하기 위한 실천을 만드는 사례를 찾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만난 협동조합이 바로 30년 역사를 가진 비오쿱과 협동노동​으로 마을의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한 47년의 역사를 가진 파크슬로프푸드쿱(PSFC), 그리고 PSFC의 모델을 대중적으로 전파한 신생협동조합 라 루브이다.4)

비오쿱은 그야말로 생태적, 탈성장 전략을 온전히 실현함으로써 조합원들과 고객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모토처럼 땅에서 식탁까지 철저하게 100% 유기농과 친환경을 실천한다. 

그렇게 하여 유기농 생산을 확대하고, 전기값이 20% 비싸도 모든 매장이 재생에너지를 100%를 사용하고, 온실효과를 유발하는 비닐하우스 재배를 금지하며, 자전거로 배송을 한다. 그 뿐 아니라 어느 곳은 잘 되는 대로, 어느 곳이 망해도 내버려 두는 각자도생의 운영이 아니라 강력한 재분배 정책을 실현함으로써 ‘우리는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지도록 한다. 

파크슬로프푸드쿱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설립한 라루브는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어떻게 협동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고 실현한 사례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동의 협동이다. 그리하여 모든 조합원이 노동에 참여하여 서로를 돌보고 공동으로 운영하는 협동조합 결사체를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이 사례의 공통점은 앞서 말한 노동, 자본, 생각의 협동을 고루고루 잘 실천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그 중 결사체의 핵심인 ‘생각의 협동’을 경영의 중심에 두고, 타협하지 않고 운영한 결과이다. 그리하여 엇나감이 없이, 한마음으로 강력한 협동의 힘을 발휘하여 저성장시대를 훌쩍 뛰어 넘는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성장 시대라고 시장만 바라보며 한숨 지을 일이 아니다. 협동조합은 그 안에 이미 이용자와 투자자와 노동자를 가지고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시장 형성에 중요한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잠자고 있는 조합원, 무관심한 조합원, 냉소적인 조합원들로 인하여 무력해진 조직을 살려 강력한 협동의 힘을 발휘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협동조합은 가입과 동시에 조합원이 되고, 조합원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제하며 주인노릇을 하는 사람이다. 그 주인노릇에는 이용자로서의 역할과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라는 투자자로서의 역할도 주어진다. 하지만 다수의 조합원들은 출자금을 내고 가입하는 과정을 조합이 제공하는 서비스나 재화를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과정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관행을 타파하고 방향을 전환하지 않는다면 경제적인 지속가능성도, 사회적인 목적도 어느 하나 제대로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거시적으로는 시대가 던지는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며 바람직하고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의 지지와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어야 한다. 

 

마치며: 행복의 역설

18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시민경제학 혹은 행복의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있었다. 이 학문은 나폴리의 안토니오 제노베시(Antonio Genovesi)라는 학자가 시작하였고, 현대에 이르러 협동조합의 이론가인 스테파노 자마니(Stefano Zamagni)를 비롯하여 루이지노 브뤼니(Luigino Bruni) 등 저명한 경제학자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이 시민경제학은 미국의 경제학자인 리챠드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에 의해 새로이 조명된 ‘행복의 역설’로 유명하다. 그것은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지 않고서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라는 것이다.5)

소비자만 있다고 소비자협동조합이 가능한가? 
농사짓는 사람이 있어야 생산해 줄 것 아니가? 

그러면 생산자만 있다고 가능한가? 운전하고 배송해주고 날라주고 사무 보는 노동자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한 쪽만을 고려한 협동조합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장일순선생은 “이게 없으면 저게 없고, 이게 있으면 저게 있고 우주의 모든 질서는, 사회적 조건은 그렇게 돼 있단 말이야. 그러니 누구를 무시하고 누구를 홀대할 수 있느냐는 말이지.”6) 그러하다. 선생은 사람과 사람만이 아니라 벌레나 풀, 나무와도 한살림이라 하셨다. 그래서 나는 한살림이란 협동의 다른 말이라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협동하고, 사람과 자연이 협동하는 것이 순리이며 본디 참다운 삶이다. 그 참다운 삶의 길을 따라 협동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협동조합일 것이다. 

저성장시대를 뛰어넘고 탈성장 사회로 가기 위해 굳이 스피노자와 장일순, 그리고 제노베시를 거론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는 모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여전히 성장과 부를 위하여 협동조합 한다면 협동조합 또한 가난을 만드는 데 일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한다면 ‘가난이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이 협동조합의 역설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주의 법칙을 따르는 협동조합의 법칙일 것이다. 

 

1) 출처: 복음과상황 252호(2011. 9.29) http://m.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999
2) 레이들로박사는 세계 각 지역에서 발전해 온 협동조합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세단계의 성장과 변화를 거쳐왔음을 알 수 있고, 각 단계마다 협동조합이 직면하여 극복해야 할 위기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첫 번째 위기는 신뢰의 위기, 두 번째는 경영의 위기, 세 번째는 이념의 위기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김동희역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2000)의 제I장을 참고하기 바란다. 
3) 이러한 내용은 (사)모심과살림연구소(2017)에서 발간한 『깊은 협동을 위한 작은 안내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4) 비오쿱과 라루브의 사례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한살림재단에서 발간한 ‘2019생명협동연구 결과보고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파크슬로프푸드쿱의 사례는 모심과살림지 6호(2015), ‘지역살림과 협동노동의 협동조합’에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
5) Alain Caillé, Marc Humbert, Serge Latouche; Patrick Viveret(2011), 『De la convivialité dialogue sur la société conviviale à venir』, La Découverte. 
6) 최성현(2004), 『좁쌀 한 알』, p. 35~36. ​

글 김신양 한국사회적경제연구회 회장

(이 글은 계간 무위당사람들 70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