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0-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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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조회수 | 1,317 | |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살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 · 웅진지식하우스 2020 다들 ‘위로’를 원한다. 대충 엇비슷한 것 말고 진짜 위로 말이다. 꽤나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이
유로 지쳐있었다. ‘괜찮아? 힘내’ 정도로는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울적함이 이제는 꽤나 보편적인 감정이
되었다. 둘러보면 하루의 시작이 두렵고 벅차다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세월이 변한 걸까 아니면 다들 솔
직해진 걸까. 때로는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타인을 위로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 악의는 없지만 작은 우울
을 큰 절망으로 바꾸는 결과를 낳는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 정도면 양호한 편이야.’ 타인을 민감하게 관찰할 필요가 없는, 연령불문의 어른들이 주
로 하는 말이다. 꼰대라는 호칭은 식상하니까 이쯤에서 설명을 마무리한다. 다행히 인간은 배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배워서 남에게 준다. 그래서 어떤 현명한 이들은 구체적인 위로의 방법을 널리 알려주기도 한다.
허지웅의 신간 <살고 싶다는 농담>은 삶이 버거운 이에게는 뜨거운 위로를, 우울한 주변인을 둔 이에게는
미더운 해답을 건네는 책이다. 괜찮게 살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사람들이 종종 있다. 주
로 유명인이다. 허지웅 또한 잠시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진 사이 병마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내가 기억하
기로 허지웅은 잘 벼린 칼날 같은 사람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만만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요즘은 칼날보단 ‘칼집’처럼 느껴진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다. 읽는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려
는 세심한 의도가 곳곳에서 엿보인다. ‘예민함은 더 많은 것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 주지만 꼭 그만
큼 공연한 슬픔을 안겨주기도 한다.’ - <살고 싶다는 농담> 중 위로는 어렵다. 우울은 보편적인 감정
이 되었지만 그걸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에 대한 공론은 없다. 사람마다 기준이 너무나 다르니까. 그래도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친밀한 타인을 위해 어떤 위로가 진짜인지 정돈을 해둘 필요가 있다.
위로의 적합한 방향을 찾고자하는 독자에게 <살고 싶다는 농담>은 꽤나 따뜻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글 황진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