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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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조회수 | 6,072 | |
원주시 일산동 구 지하상가에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의 설립·운영을 지원하고 교육하는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외지 사람들이 원주의 협동조합 정신을 배우기 위해 찾아옵니다. 사무실 옆 교육장에서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무위당기념관과 가톨릭센터, 원동성당을 성지순례 하듯이 탐방을 하고, 한살림원주·노인생협·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같은 원주의 대표적인 협동조합을 견학하고 돌아갑니다. 이제 원주는 많은 사람에게 ‘협동조합운동의 도시’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원주에는 80여 개의 협동조합과 29개의 사회적기업, 8개의 마을기업이 있습니다. 주민 5명 중 한 명이 협동조합에 가입돼 있을 만큼 협동조합이 담고 있는 정신이 원주시민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주는 어떻게 협동조합의 도시가 되었을까요?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의 만남 1965년에 천주교의 총 본산인 로마 바티칸에서는 가톨릭교회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타진하고, 교회를 현대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습니다.
바티칸공회가 끝나고 교황청에서 강원도를 담당하는 춘천교구를 나눠서 강원도 남쪽에 원주교구를 설정하게 됩니다. 원주교구 관할 지역은 10만밖에 되지 않는 원주시와 영월, 삼척 등 산악지역과 탄광지역, 농어촌지역 정도였습니다. 지역적으로는 교통의 오지이며 문화적, 경제적으로 그야말로 매우 열악한 지역이었습니다.
그 당시 장일순 선생은 감옥에 다녀와 정치활동정화법에 따라 사회활동을 제약받고 있었습니다. 1965년에는 자신이 설립한 대성고등학교 학생들의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성학교 이사장도 그만두고 집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두 분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후 두 분은 평생의 지기로 협동조합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다가 지학순 주교는 1993년에, 무위당 선생은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생전에 두 분은 서로 짝사랑하듯이 가까운 사이로 지냈는데 지학순 주교는 무위당 선생이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었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무위당을 원주교구 사도회장에 임명했고, 원주교구를 배경으로 사회 전반적인 면에서 운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의 관심은 오로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협동조합운동의 기반을 다지다 지학순 주교는 무위당 선생과 의논해 1966년에 원동성당 안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무위당 선생님이 이사장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필두로 황지신협, 문막신협, 단구동신협, 삼척신협이 잇달아 설립됩니다. 그런데 신협운동 경험이 너무 없다 보니까 잘 진척되지 않아 서울의 신협 관계자들을 초청해서 교육을 받으며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이때 무위당 선생은 “협동조합운동은 지속적인 교육과 지도가 뒷받침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동교동에 있는 협동교육원에 무위당 선생의 둘째 동생인 장상순 씨를 서울 주재원으로 파견해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교육을 마치고 원주에 돌아온 장상순씨는 1969년 9월에 지학순 주교가 세운 진광중학교에 ‘협동교육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주 1회 1시간씩 ‘협동’이라는 과목을 개설해 학생과 교직원이 의무적으로 협동조합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이듬해에 ‘진광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 협동조합입니다. 이곳에서 여·수신 업무뿐만 아니라 매점을 운영하고 교과서와 교복을 공동구매하는 사업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이것이 커져서 식당까지 직영해 친환경 식단을 학생과 교직원에게 싼 가격으로 제공했습니다.
1971년은 가톨릭 신자 중심으로 운영돼온 원동 성당의 협동조합이 원주시민을 대상으로 한 협동조합 조직으로 탄생한 해입니다. 원주 가톨릭센터 안에 소시민들과 시장의 난전에서 장사하는 상인을 상대로 ‘밝음신용협동조합’이 창립되었습니다. 이 신용협동조합은 10년 후 원주 시내로 나가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에 이른 ‘밝음신협’입니다.
원주교구는 세계 각국의 가톨릭 구호기관에 연대를 호소했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독일에 가서 독일 선교재단에게 수해복구자금을 요청해 3억 5천만 원을 지원받았습니다. 당시 이 돈은 군(郡) 단위의 1년 재정과 맘먹는 큰돈이었습니다. 국제기구의 지원을 계기로 원주교구는 종교, 행정기관, 교육계, 언론계 대표 등을 망라한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구성하여 재해복구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생명운동과 한실림운동 무위당 선생은 1970년대 중반까지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막후에서 지원했습니다. 선생은 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지금까지의 민주화운동이 투쟁 일변도의 운동에 머물러 있을 뿐 전 지구적 문제인 생명 존중, 자연 및 환경 보전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면서 ‘생명운동’으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우리가 모두 소비해주겠다”면서 원주시 공근면의 가톨릭 농민회원 10집을 모델로 유기농산물 계약재배를 시작했습니다. 화학비료 안 쓰고, 제초제도 안 쓰고, 땅에 자연 퇴비와 거름만 주고 ‘땅 살리는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한살림운동은 표면적으로는 농산물 직거래조직이지만 병들고 죽어가는 이 땅의 하늘과 흙과 물과 밥상을 살리자는 운동입니다. 생명의 원점인 밥상에서부터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자는 무위당의 생명사상이 구현된 협동조합운동이며, 이 운동은 서울의 변방 강원도 원주의 선각자들에 의해 싹을 틔운 것입니다.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두 분의 정신은 원주에 면면히 살아있습니다. 2009년 7월에 협동조합 간의 활발한 연대를 통해 지역 주민의 삶과 경제를 이롭게 하고, 협동과 자치의 지역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가 창립됐습니다. 이곳에 원주지역의 30개 협동조합이 가입해 끈끈한 연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