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0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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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20170919_130726.png | 조회수 | 4,800 |
생명 도시, 건강 도시를 표방하는 원주에서는 국제 걷기 운동 등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걷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히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걷는 길 위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필요하다. 아니 의미 있는 길을 찾아서 걷는 일이 필요하다. 원주에서도 얼마든지 의미 있는 길을 찾아볼 수 있다. 봉산동 천주교회와 자택에서부터 원주천 둑길을 거쳐 쌍다리를 건너 원동성당과 원주가톨릭센터에 이르는 길, 다시 중앙로를 걸어 밝음신협에 들렀다가 차 없는 문화의 거리를 지나 일산동 로데오거리에 닿는 길은 생전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늘 걸었던 길이다. 조금씩 달라진 곳도 있지만 늘 그 자리에서 무위당의 삶과 사상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길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원주시 차원에서 이 길들의 의미를 살려내어 느낌이 살아있는 길, 마음으로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길로 가꾸어야 할 때이다. 최근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이들이 선생의 삶의 흔적과 사상의 자취를 좇아 원주를 찾아오고 있어서 이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땀을 내기 위해 운동하기 위해, 걷는 길만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길 위에 새겨져 있는 역사성과 그 길 위를 걸어서 다녔던 선각자의 철학과 사상을 음미하며 걸을 수 있는 길, 그 길이 바로 무위당의 길이다. 옛 모습 거의 그대로 변하지 않은 길, 봉산동에서 원동으로 다시 중앙로를 거쳐 일산동으로 이어지는 원주의 구도심에 자리 잡은 이 길의 의미를 살려내고, 그리하여 원주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무위당의 흔적을 찾아 전국 각지에서 원주를 찾아오는 많은 이들에게 친절한 안내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인 것이다 . ❶ 소박하고 아름다운 봉산동 천주교 성당 1972년에 창설되었습니다.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님은 이 성당에서 평신도 교육을 위한 학습 프로그램을 개설했습니다. 장일순 선생께서 주관한 이 공부 모임에서는 성서와 함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헌들을 공부했습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요한바오로23세는 ‘세상 안으로’를 외치면서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는 교회, 독선적이고 자기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교회 대신 봉사하고 예언적인 자세를 가진 교회, 강요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추구했습니다. 천주교 봉산동 교회에 함께 모여 공부했던 무위당과 젊은이들은 바로 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한국 교회의 현실 속 에 구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무위당 선생은 당시 원주교구 제 2대 평신도 협의회장을 역임하면서 사목헌장과 공의회 정신 등에 대해 평신도 교육을 진행하셨습니다. 무위당 선생 댁 바로 앞에 있는 성당이라 생전의 무위당 선생님과 인연이 많았던 곳이며,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이곳에서 장례 미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❷ 희망의 빛 한줄기를 품고 돌아가는 (구)봉산동 파출소 옆 골목길 봉산동 천주교회 건너편, (구)파출소 뒤쪽으로 나 있는 짧은 골목길입니다. (구)봉산2동 파출소는 권력 기관에서 무위당 선생 의 행적을 감시 감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설치한 것으로 알려 져 있습니다. 지금은 봉산동 지구대로 통합되어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이 자리에는 카페가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주변으로 2차선 소방도로가 새로 뚫리고 새집들이 들어서는 등 변화가 많았지만, 몇 십 년째 같은 모습으로 동네 어귀를 지키고 있는 좁은 골목길입니다. 왼쪽 담장 뒤로 올라온 흰 벽과 지붕이 선생님 댁입니다. 우뚝 솟아오른 나무도 선생님 댁 마당 에서 있습니다. 원주천 둑길이 선생님께서 즐겨 다니셨던 길이라면 이 골목길은 선생님을 찾는 이들이 주로 다녔던 길입니다. 암울했던 시절, 많은 이들이 선생님을 만나러 이 길을 지나갔습니다. 정치인이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인, 평범한 회사원 까지 시대의 질곡 속에서 고뇌하고 번민하던 이들이 감시의 눈길을 피해 이 좁은 골목길을 후다닥 지나서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시국을 논하고 술잔을 넘기며 울분을 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빛 한줄기를 마음 에 품고 돌아갔습니다. 몸 숙이고 이 길을 지나는 그들을 지켜보는 감시의 눈빛도 그땐 늘 이 길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추억의 골목길, 선생님은 먼저 이 길을 떠나셨지만, 예나 지금 이나 여전한 모습으로 그대로인 좁은 길입니다. 1955년, 무위당 선생께서 손수 지은 자택입니다. 지금은 사모님이 살고 계시고, 바로 앞에는 무위당 선생의 동생인 장화순 전 진광고 교장님 댁이 있습니다. 생전의 선생님 숨결과 자취가 서린 곳입니다. 어려웠던 시절,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선생님과 밤을 새우며 우주의 철리(哲理)와 현실의 모순을 논하고 가슴 가득 생명에 대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담고 돌아갔던 마음의 쉼터입니다. 2007년 원주시 봉산동 일대에 주거환경개선사업이란 명목으로 재개발 아파트 건축이 추진되면서 자칫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재개발 사업은 2009년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언제 다시 재개발 바람이 불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유행처럼 구석구석 곳곳에 번져나가는 개발의 열풍이 이곳 무위당 선생의 자택까지 미쳐 오는 것을 보면서, 당연히 지키고 보존해야 할 당위성 앞에 많은 이들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원주시에서는 문화지구로 지정하여 이곳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❹ 사색과 생명의 원주천 둑길
“주로 혼자서 걸어요.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다가 돌아올 때는 대개 강가로 난 둑길을 걸어서 돌아와요. 둑길을 걸으며 ‘오늘 내가 허튼소리를 많이 했구나.’하고 반성도 하고 ‘이 못난 사람을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 주시는구나.’하고 감사도 하고 그럽니다.” 생전에 늘 다니시던 원주천 둑길입니다. 이 둑길에서 무위당 선생은 많은 사람과 뭇 생명을 만났습니다. 시멘트로 포장도 되고 멀리 고층 아파트도 생겨 자갈길이었던 예전의 모습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 길에 서면 무위당 선생님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원주 시내까지 15분이면 충분한 이 길을 선생님은 어느 땐 한 시간도 걸리고 두 시간도 걸리며 다니셨다고 합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안부 인사 나누느라고 그랬고, 또 이 길 위에서 만나는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와 대화하느라고 그랬습니다. 선생님에게 이 길은 우주와 교감하는 사색의 길이자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❺ 서민들의 삶터에 이르는 길, 원주교-쌍다리 원주교는 원주천을 건너는 여러 다리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리입니다. 사람들은 이 다리를 쌍다리라고 부릅니다. 차가 다니는 폭이 넓은 다리와 사람들만 건너다니는 폭 좁은 다리가 나란히 붙어서 놓였기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무위당 선생은 봉산동 자택을 나서서 좁은 골목길을 지나 둑길에 올라선 뒤 이 다리까지 천천히 걸으며 강물과 하늘과 자갈길 사이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과 이야기 나누셨습니다. 또한,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지고 이 길을 지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그렇게 짧고도 긴 길을 걸어서 이 다리에 도착하고 이 다리를 건너면 바로 원동성당과 가톨릭센터, 그리고 서민들의 삶터인 시장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과 만나 토론도 하시고 조언도 주시고, 때론 막걸리도 한잔 나누신 뒤 다시 이 다리를 건너 그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어떤 때는 미처 못다 한 이야기를 지인들과 함께 이 다리를 건너며 마저 나누기도 했을 것이고, 또 어떤 때는 그 대화의 자리 가 선생님 댁까지 계속 이어져 밤을 새우는 토론 마당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확장 공사를 해서 전보다 훨씬 넓어졌지만, 선생님의 발자취가 묻어 있어 더욱 정겨운 다리입니다.
❻ 한국 민주화 운동의 성지, 원동성당 원동 본당은 1896년 8월 17일에 풍수원과 부엉골에 이어 강원도의 세 번째 본당으로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1954년에 바 드리시오 신부가 건평 396.7㎡(120평) 규모의 현재의 성당을 신축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중앙 종탑의 꼭대기에 돔 을 얹은 독특한 양식으로 횡성성당과 더불어 1950년대 원주 지역 성당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등록문화재 제139호(등록 일 2004년 12월 31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970년 방송을 통해 더욱 광범위한 선교활동을 하고자 했던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원주문화방송국 설립에 참여하면서 방송국의 부정을 알게 됩니다. 지학순 주교와 원주교구는 수차례 방송국의 운영을 맡고 있던 5·16장학회에 시정을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1971년10월 5일 오후 7시 30분, 원동성당에서는 원주 교구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1,500여 명이 모여 역사적인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가 거행됩니다. 미사를 마친 이들은 곧이어 부정부패 규탄 궐기대회를 열어 국회, 정부,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선언문, 부정부패 규탄문, 결의문을 채택한 뒤, 지학순 주교를 선두로 1,500여 명의 시민들이 가두시위에 나섰습니다. 경찰의 제지를 받은 시위대는 원동성당으로 돌아가 이틀 동안 철야기도를 하며 자리를 지켰고, 이 대회는 7일 오후 5시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위원회’ 결성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원동성당은 원주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지학순 주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원동성당은 유신 치하인 1974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부상합니다.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1974년 6월 중앙정보부에 강제 연행된 사건은 한국교회가 이후 방관자적인 자세를 버리고 사회 정의 구현에 앞장서는 데 기폭제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지학순 주교의 적극적인 행동에 자극을 받은 전국 각지의 사제 300여 명이 1974년 9월 말 원동성당에서 모임을 한 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였습니다. 사제단은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지 주교 석방을 촉구하는 가두시위를 벌였습니다. 1976년 1월 23일에는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신·구교회의 합동으로 원동성당에서 열려 반유신운동의 불씨를 살려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원주선언입니다. 이후 5·18 민중항쟁 추모 미사를 비롯해 박종철 추모 미사, 인권회복 고문반대 미사 등 단지 안녕과 평온을 희구하는 미사가 아닌 사회의 각성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미사가 이곳에서 이어졌습니다. 또한, 이곳은 경찰의 폭력에 쫓겨 다닌 시위대의 최후 은신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❼ 지역 문화·예술의 본산지, 원주가톨릭센터 1968년에 건립되었고, 1971년에 증축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센터 옥상은 원주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습니다. 옥상에 서면 치악산과 원주천, 그리고 원주 시내가 다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름이면 소박한 스카이라운지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곳의 지하 다방은 지역의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지금은 치악예술관 이나 백운 아트홀 같은 대형 공연장, 전시관 등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1970년대에는 원주의 모든 음악회, 연극 공연이나 미술전, 서화전 등이 이곳 1층의 전시실과 공연장에서 열리는 등 지역 문화·예술의 본산지 역할을 했습니다. 1973년에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가 처음 공연된 곳도 바로 원주가톨릭센터입니다. 이 희곡의 주제가인 ‘주여, 이제는 여기에(일명 ‘금관의 예수’)’는 김지하의 시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것으로, 첫 공연지인 원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작곡되었습니다.
원주밝음신협은 1971년 8월 31일, 원주 지역 소상공인과 직장인, 소시민들이 모여 창립하고 1972년 12월 30일,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은 비영리법인입니다. 창립과 성장 과정에서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님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도움과 지도를 받았습니다.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라는 원칙에 따라 단순한 금융 기관이 아니라 사회 참여와 복지에 대한 기여를 함께 실천해가는 협동 조직입니다. 따라서 조합원들 스스로 자조·자립·협동의 정신을 실천해 나가기 위해 다 함께 잘 살기 위한 경제 운동, 사회를 밝히는 교육 운동, 더불어 사는 윤리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동안 소리 없이 조용히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1980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