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나는 나쁜 이야기의 독소를 정화시켜 끝내 아름다 운 이야기의 강물로 흘러가게 만드는 더 큰 이야기 의 힘을 믿는다. 솔닛은 더 강력한 이야기를 창조함 으로써 자신에게 강요된 나쁜 이야기의 마법과 싸 워 마침내 승리하는 이야기의 전사다.” - 정여울 문학평론가 고등학교 시절 문학회를 결성한 적이 있었다. 우리 끼리 어설픈 소식지를 만들고 편집을 하고 복사를 해서 토론을 했다. 때로는 중앙시장의 허름한 중국 집 2층에서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며 빨치산과 토벌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당시 우리 사이에 유 행했던 소설은 대부분 대하소설이었다. 조정래 선 생의 「태백산맥」을 필두로 빨치산과 관련된 소설 이 주를 이뤘다. 「녹슬은 해방구」 「지리산」 「남부 군」 등이 우리의 독서 대상이었다. ‘삼다(三多)문 학회’였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자는 의미였던 것 같다. 읽고 쓰며 고독한 생각에 묻혀 보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많이 읽지 도 쓰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대신 고독을 안주 삼 아 어린 학생들이 소주는 자주 마셨던 것도 같다.
소설 마시는 시간
술과 책, 행복한 시간을 만나다 쿠바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소설 때문이었 다. 수도 아바나 동쪽의 어촌마을 코히마르에 찾아 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단골이었다는 레스토랑 ‘ 라 테레사(La Terraza)’에 가서 칵테일을 한 잔 마 시고 낚싯배가 떠 있는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다. 「소설 마시는 시간」이라는 제목, ‘그들이 사랑한 문장과 술’이라는 부제는 그래서 퍽 흥미롭게 다가 왔다. 좋아하는 작품에 나오는 그 장소, 작가가 글 을 쓰고 고민했던 그 공간에 대해서 특별한 애정을 가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설에 등장 하는 술’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작은 이 책을 가볍게 들춰보았 다. 기대보다 더 좋았다. 소개된 책 중 읽어본 것도 있었는데, 「위대한 개츠비」나 「호밀밭의 파수꾼」, 「캐롤」처럼 주인공의 술 마시는 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르는 경우도 있었고, 「롤리타」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은 읽을 당시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장면들이어서 새로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직 읽지 못한 것들도 얼른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 마 읽게 된다면 이 책에 나온 장면들을 좀 더 주의깊게 보게 되리라. 처음엔 수록된 열여덟 권을 한 권씩 찾아보며 읽어 가려 했지만, 술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저자 의 글투가 친근하고 너무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 었다. 책은 물론이거니와 술과 음악, 문화 전반에 대한 저자의 관심과 해박함을 엿볼 수 있었다. 책에 는 저자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도 언뜻 나온다. 저자 정인성은 좋아하는 것들, 즉 책과 술이 있는 공간을 운영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단다. 서울 연희동 에 있는 바 겸 심야서점인 ‘책바’가 바로 그 공간 이다. 찾아 들어간 책바의 SNS에는 ‘책과 술의 공감각을 구현하는 바’라는 설명과 ‘1인 손님 환영’이라는 문 구가 적혀 있다. 퇴근길 가벼운 맘으로 들러 책을 읽 고 술을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라 니,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생각해 보면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던가. 술과 책을 좋아하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기쁨. 언젠가 나도 조그만 서점을 열기를 꿈꾸며,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소설 마시는 시간’을 탐닉해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글 원상호 / 글 이새보미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