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스토리


LIFE STORY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6-29
첨부파일 조회수 4,077



1987’을 보면서 떠오른 얼굴, 무위당 장일순

새해가 열흘이나 지났는데도 지난 세밑에 본 영화 의 감동이 아직도 가슴에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영화 제목은 ‘1987’(장준환 감독). 전두환 정권시 절 공권력의 고문에 의해 사망한, 이른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폭로해 6월항쟁 을 촉발시킨 인물들의 양심과 신념에 찬 행동을 그 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다른 영화와는 달리 한 인물을 영웅시 하지도 않고, 특정 인물의 활약상을 집중해서 보여 주지도 않는다. 인물 각각의 선의가 어떻게 정의로 움으로 연결돼 민주주의의 역사를 바꾸어냈는지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 사람이 아니다. 악행을 저지른 권력자들와 그 하수 인들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자리에서 양심과 신념을 지킨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다.  물고문으로 죽은 박종철과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 2003년에 타계한 김승훈 신부와 배우 김 태리가 연기한 허구의 인물 연희를 제외하고 영화 속 캐릭터의 실제 인물들은 모두 생존해있다. 그래 서 이 영화는 허구라기보다는 현실과 역사 위에 영 화적 상상력을 보탠 다큐드라마의 성격이 짙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그 중심에는 동아 투위 출신의 해직 언론인 이부영과 1965년에 굴욕 적인 한일협정 반대투쟁의 중심에 섰고 70년대에 는 유신독재에 저항하면서 감옥에 갇힌 민주인사 들의 수발과 구속자 가족 뒷바라지를 해온, 민주화 운동의 대부 김정남이 있다.
1986년에 직선제 개헌 투쟁 혐의로 영등포교도소 에 수감된 이부영은 철창 밖에서 “박종철을 고문으 로 죽인 범인이 조작되었다”는 교도관들끼리 주고 받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게 되고, 이 사실을 쪽지 에 휘갈겨 써서 감옥에 갇힌 민주인사를 몰래 돕고 있던 교도관 전병용을 통해 김정남에게 전달한다. 당시 김정남은 수배 중이었다. 김정남은 편지의 내 용을 토대로 고문치사 조작의 전말을 문안으로 작 성해 비밀리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 에게 전달한다.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정권이 뒤집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두려워서 발표를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 정보를 김 정남이 제공했다고 공개해도 좋으니 꼭 발표해 달 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작년에 김정남 선 생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 함세웅 신부는 전달 받은 문안을 정의구현사제단 의 좌장격인 김승훈 신부에게 다시 전달하였고, 김 신부는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광 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시간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범인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 했다. 박종철의 죽음을 단순 쇼크사로만 알았던 국 민들은 분노했고, 거대한 분노는 이내 6월항쟁의 불길로 타올랐다.
영화에서 폭압정권에 양심과 신념으로 맞선 인물 들에 대한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었다. 특히 배역들 이 실존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 영화 의 사실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거기에 더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뛰게 만든 것은 영화의 주인공격 인 김정남, 이부영 선생이 ‘무위당사람들’ 회원이라 는 것과 영화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 중 상당수가 70~80년대에 독재정권과 싸우는 방법과 엄혹한 시대를 헤쳐 나가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 무위당 선 생을 만나러 원주를 수없이 다녀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영화 도입부에 주인공격 인 인물들의 이름을 소개하는 자막이 나올 때는 괜 히 반가웠고 캐릭터 얼굴 위로 무위당 선생의 얼굴 이 겹쳐지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에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무위당을 알게 된 김정남은 당국의 감시망을 뚫고 여러 번 원 주를 찾아와 무위당 선생 집 대문을 두드렸다. 두 사람은 무위당이 서재로 쓰는 작은 방에서 밤을 지 새우며 대화를 나누었고 무위당의 말씀에 용기를 얻은 김정남은 다음날 새벽에 집 앞으로 난 골목길 을 빠져나갔다.   “수배로 쫒기면서 내 몸 하나 의탁할 공간이 어디에 도 없어 하염없이 밤길을 걸을 때는 절망감이 밀려들곤 했어요. 이럴 때 원주는 가장 안전한 피신처였 어요. 불의에 저항하는 동지들이 피할 곳을 찾아 원 주로 가면 너른 품으로 받아주시고 은신처를 마련 해 주신 분이 무위당 선생님이셨어요.”(계간지 ‘무 위당사람들’ 56호 41쪽) 감옥에서 교도관들끼리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듣고 진실을 밖으로 알린 이부영 역시 시대를 아파하고 고민하던 70년대에 무위당을 찾아와 위로와 격려 받았다. “그 혹독했던 시절에 무위당 선생님은 형 사도 없고 안기부 요원도 없는 치악산 계곡으로 우 리들을 비밀리에 부르셔서 냇물에 발 담그고 앉아 정답게 끌어안고 술을 먹여주셨어요. 선생님은 우 리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용기와 사랑을 주 셨습니다.”(2015년 무위당학교 강연에서)

김정남으로부터 고문치사 사건의 전말이 담긴 문 건을 전달 받은 함세웅 신부는 1974년에 유신반대 투쟁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었을 때 전국의 사 제 300여 명을 원주에 불러 모아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을 출범시키는데 앞장선 분이다. 이부영이 쓴 쪽지를 비밀리에 김정남 선생에게 전 달한 민주 교도관 전병용. 그는 이미 1974년에 긴 급조차 위반으로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 지학순 주교를 살뜰히 보살피면서 비둘기처럼 지 주교의 편지를 외부로 전해준 민주화운동의 숨은 조력자 였다. 1975년에 인혁당 사건으로 투옥된 김지하의 양심선언문을 감옥 밖으로 빼내 김정남에게 전달 한 사람도 그였다. 전병용 교도관은 나중에 이런 사 실이 발각돼 구속된 뒤 모진 고초를 받았으며 이후 민주화운동 진영의 일원이 되어 지학순 주교와 무 위당 선생을 만나러 원주에 오기도 했다.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와 무위당 선생에 얽힌 일화는 참으로 감동적이 다. 1988년에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에서 만남 의집 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서화전을 준비하고 있 을 때였다. 박정기씨는 유명한 서울대 교수를 찾아 가 작품 후원을 부탁했다. “제 작품은 아무리 작아 도 400만원이 넘습니다. 제가 박종철이 죽은 거하 고 무슨 연관이 있나요? 그 아이가 죽으면 죽었지, 왜 이렇게 와서 날 괴롭히는 겁니까?” 단번에 거절 당한 박정기씨는 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 여사 와 함께 무위당 선생 댁을 찾았다. 서화전 계획을 들은 무위당 선생은 두말없이 그 자리에서 벼루와 먹을 꺼내 난을 쳤다. 무위당 선생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형상을 한 난을 포함해 다섯 점의 작품을 신 문지에 말아 건네주며 말했다. “원하시는 일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작품이 필요하면 또 찾아 오십시오.”(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2012년 3월 15일자)

무위당은 치악산을 모월산(母月山)이라고 부르면 서 원주사람들은 원주에 오는 사람들을 어머니가 아들 친구에게 대접하듯이 잘 모시고 품어줘야 한 다고 말했다. 그는 불의에 대항하다 쫓기는 사람들 이 찾아오면 따뜻하게 끌어안아준 성자 같은 사람 이었다. 사람들은 무위당을 ‘원주의 예수’라고 불렀 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원주를 ‘원주캠 프’라고 불렀다.
올해로 6월항쟁 31주년을 맞는다. 영화 속에 나오 는 6월항쟁의 주역들은 대부분 일흔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되었다. 이 노인들의 가슴 속에 원주는 민주 화운동 역사에서 의미가 큰 도시로 각인되어 있다. 이분들은 여전히 원주를 ‘민주화의 성지’라고 부르 면서 고난의 시기에 자신들을 너른 품으로 받아준 무위당 선생을 잊지 못한다. “여러분들은 원주라는 작은 도시에 사니까 잘 모르 실 수 있지만, 저는 서울에서 동쪽 원주를 바라보면 서 대한민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민주의 문제, 통 일의 문제, 복지의 문제를 이야기 할 때 원주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원주 쪽 을 바라볼 때마다 지학순 주교님과 무위당 선생님 얼굴이 떠오릅니다.”(무위당학교 이부영 선생 강연 중에서)  “원주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고비에서 희생하고 헌신해온 도시입니다. 그래서 원주는 역사적으로 주목받아 마땅한 도시라고 생각해요. 원주가 무위 당 선생님의 따뜻함과 지성스런 정신을 간직하는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무위당 소식지 ‘노변 정담’ 김정남 선생 인터뷰 중에서) 영화를 보고난 다음날 김정남 선생과 전화통화를 했다. 김 선생님은 작년 이맘때 ‘무위당사람들’ 소 식지에 무위당 선생님을 회고하는 인터뷰를 해주 셨고, 무위당학교에 강연하러 오시기도 했다. “영화를 보셨냐?”고 묻자 “아직 보지 못했다”면서 “내일 보려고 한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그러 면서 “요즘 영화 본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많이 온 다”며 쑥스러워 하셨다.     누군가 “민주주의는 공짜로 얻어지지도, 새로운 시 대는 저절로 열리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민 주주의를 이만큼 누릴 수 있기까지에는 목숨을 걸 고 신념을 지킨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 그 힘이 쌓여 30년 뒤 우리는 촛불로 불의한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되찾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민주주의를 위해 양심과 신념을 지킨 김정남·이부 영·함세웅·전병용 그리고 이분들에게 두려움을 떨 쳐낼 수 있는 용기를 심어준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께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PS.  며칠 전 영화를 본 스물네 살의 딸애가 이런 문 자 메시지를 남겼다.   “ 아빠, 우리를 암흑시대에 살지 않게 해주셔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