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하던 후배가 있었다. 마음은 이미 회사를 떠났지만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둡고 침침한 회사 복도 끝에서 고민을 털어놓던 그에게 한마디 건넸다. ‘십 년을 쌓았건 이십 년을 쌓았건 그것이 모래성인 줄 알았다면 허물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 집착이 병통이다’라고 말이다. 후배는 다음 날 사직서를 제출했고 이주일 후 회사를 떠났다. 퇴사 후 가게를 오픈한 그를 찾아갔을 때 ‘모래성 이야기’가 퇴사를 결심할 수 있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고마워했다. 그를 찾아가기 전까지 ‘혹 괜한 말을 해서 후배가 회사를 그만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한동안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연락이 뜸해졌지만 가끔씩 후배가 회사를 그만둔 것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잘못된 선택으로 오랜 기간 그 길을 가고 있다면 과감하게 벗어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부디 후배가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몇 년 후 ‘모래성 이야기’는 내게도 적용됐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던 회사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데 이 말처럼 좋은 조언은 없었던 것 같다. ‘모래성 이야기’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께서 한 말씀이다. 김익록 선생이 엮은 무위당 장일순 잠언집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에 나온다. 초판이 2010년 1월에 나왔지만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생전에 책 한 권 낸 적 없는 장일순 선생님이지만 고인이 된 후 그의 말씀과 행동은 책이 되었고 인생의 지침이 됐다. 판화가 이철수 선생은 머리말에서 “새로운 문명이 모색되어야 할 시점이라 당신의 생명철학이 시대의 밝은 창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지만 다급한 마음에는 안타까움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생님을 알고, 그분의 예지를 흠모하게 되면 좋겠지만 아직은 우리들의 꿈이고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하는 모양입니다.”라고 아쉬워했다. 죽비가 되고 경책이 되고 위로와 격려가 되는 무위당 장일순의 말씀과 그림의 세계가 펼쳐진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를 자신의 몸처럼 여기며 살았던 삶과 적까지도 따뜻하게 감싸 안는 선생님의 인품을 짧은 글과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이미 오래전 물질 만능주의에 빠진 우리에게 던져주는 선생님의 작은 가르침이 사실은 온 우주를 담은 거대한 물결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모래성 이야기’로 회사를 그만 둔 후배에게 이 책을 선물로 보내야할 것 같다. 후배의 선택이 어쩌면 가장 옳은 길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할망은 희망” 여행에서 길을 잃으면 그곳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좋은 핑계가 생긴다. 10여년 전, 제주도에 걷기길 ‘제주올레’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중산간의 마을들을 걸을 때 나는 꽤 여러 번 길을 잃었다. 그중엔 허름한 동네의 구멍가게에 오순도순 모여 있는 ‘삼춘(제주도에서는 성별을 불문하고 친근한 손윗사람을 부를 때 쓴다)’들 한가운데에서 이야기를 나눈 경우도 있었다. ‘동무’도 없이 섬으로 여행을 왔다는 ‘비바리(처녀)’에게 삼춘들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내 나이를 얘기하자 당신들은 그때 이미 아이를 낳았노라며 젊었을 적의 이야기부터 할아버지 흉까지 제법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난다. 제주어가 너무 어려워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럭저럭 알아듣고 대답을 하자 몹시 기꺼워하셨던 기억이 난다. ‘하르방’, ‘할망’이 낮춤말이라 예의가 없으니 ‘삼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도 그 자리에서 배웠다. 수다를 마무리하고, 유통기한이 오래 지난 카메라 필름을 산 후 다시 길을 떠난 그 날 이후로 나는 제주와 제주어, 제주의 ‘삼춘’들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할망은 희망」이라는 제목을 본 순간 앞뒤 볼 것 없이 구입을 한 것도 그래서였다. ‘제주 할망 전문 인터뷰어’란 수식어를 가진 작가 정신지는 일본에서 12년 동안 지역연구학을 전공하고, 여러 이유로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 방황하던 중 ‘할망’들을 만나기 시작하며 ‘정신 차리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지난 2012년부터 제주 할망 만나기를 10년 프로젝트로 삼아 진행하고 있으며, 지난 5년 동안 매주 만나온 제주 노인들의 이야기를 하나둘 엮어 낸 구술사 기록물이 바로 「할망은 희망」이라고 한다. 「할망은 희망」은 관광지가 아닌 지난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제주의 모습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작가가 만난 할망(친근함의 표현으로 ‘삼춘’ 대신 ‘할망’을 사용했다고 권두에서 설명하고 있다)들은 일제강점기와 ‘시국(4·3 사건)’이 드리운 고통을 내보이기도 하고, ‘녀(해녀)’로 물질을 하며 살아온 일생을 회고하기도 하며, 세상을 떠난 하르방을 그리워하기도, 알듯말듯한 표현들로 인생을 통찰하는 진리를 전하기도 한다. 할망들의 입담은 때론 유쾌하고, 때론 그립고 덧없이 애틋하다. 제주어 그대로 생생하게 채록된 내용은 친근하고 따뜻하다. 알아듣기 어려운 방언 아래에 표준어 해석(?)을 일일이 달아놓은 배려도 돋보인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을 자꾸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이 아니면 만날 수 없’고,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의 발걸음을 깊게 응원하고 싶다.
글 원상호 / 글 이새보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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