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방황이 일상이던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사춘기가 늦게 왔는지 언제나 반항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먹어서는 안 될 술도 입에 댔다. 그때는 그것이 멋 인줄 알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위에 왕따를 당한 친구가 없었다는 정도다. 그렇다고 집안 환경이 불우했다거나, 학대를 당했다거나, 가난했던 것도 아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이었음에도 늘 어긋났던 것 같았다. 그 시절, 또래거나 어른이거나 간에 좋은 멘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간혹 부모보다 친구에게, 선생님보다 옆집 형에게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다. 불끈불끈 끓어오르는 청춘의 열병을 앓던 시절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 시절 좋은 멘토는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청춘의 시간을 건너온 뒤에야 올해 좋은 멘토를 만났다. 바로 ‘2018 원주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에 선정된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였다. 감정을 못 느끼는 안타까운 주인공 윤재보다, 윤재가 만나 관심을 갖게 된 곤이에게 유달리 감정이입이 됐다. 한 때 살짝 엇나가기도 했던 청소년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손 작가의 「아몬드」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윤재의 유년기부터 커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감정을 못 느끼는 윤재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끔찍한 사고를 목격하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못 느낀다. 그 사고로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이런 윤재에게 아주 특별한 친구들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윤재의 서점 2층 빵집 아저씨 심 박사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부탁하라고 말한다. 윤재의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던 심 박사는 그렇게 윤재의 멘토로 발전한다. 또 어두운 상처를 간직한 ‘곤이’와 맑은 감성을 지닌 ‘도라’가 나타난다. 윤재와 이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럼에도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윤재처럼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이라면 어떤 느낌일까?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둘 중의 하나겠지만 윤재에게는 평생을 함께 할 인연들이 있었다. 악연으로 다가와 인연이 된 친구 곤이, 차가운 심장을 뛰게 만든 도라, 기적같이 깨어난 어머니,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을 때마다 해결사 역할을 해주는 심 박사. 우리 주위에도 모르는 것 같지만 나에게 힘이 되어주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이 책은 타인의 고마움을 잊고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서 빨리 너의 감정을 표현해봐.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보채는 것 같다. 지금 당장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달려가서 표현해 보길 바란다.
'며느라기'
친구가 인스타그램에서 찾아보라며 계정을 하나 알려주었다. ‘min4rin’이라는 아이디의 계정에는 「며느라기」라는 제목과 ‘민사린의 신혼 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고 웨딩촬영 사진, 청첩장 이미지, 결혼식 장면 등이 차례로 올라와 있었다. 「며느라기」는 민사린이라는 신혼의 여성이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며 직접 운영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방식의 SNS 웹툰으로, 또 다른 SNS 플랫폼인 페이스북에도 동시에 연재가 이뤄졌다. 웹툰 제목이기도 한 ‘며느라기’의 뜻은 작중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사춘기, 갱년기처럼 며느리가 되면 겪게 되는 ‘며느라기(期)’라는 시기가 있대. 시댁 식구한테 예쁨 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그런 시기. 보통 1~2년이면 끝나는데 사람에 따라 10년 넘게 걸리기도, 안 끝나기도 한다더라고.” 평범하고, 예의바른 주인공 민사린은 결혼 후 시어머니의 생일상을 차리고, 시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챙기고, 명절날 시댁의 제사에 참여하면서 차츰 무언가 불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왜 자신이 좋은 며느리가 되고자 했는지 궁금해진다. 웹툰 「며느라기」는 가히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인스타그램에서 40만 명, 페이스북에서 20만 명 이상이 이 계정을 팔로(follow) 했으며, 개개 게시글의 좋아요는 3만 개가 넘는다. 독자들은 민사린의 신혼생활, 특히 며느리로서 겪는 일상에 깊이 공감하고 댓글을 달고 친구들을 ‘소환’했다. 「며느라기」에는 과장된 드라마처럼 극악한 시부모님이나 안하무인의 며느리가 나오거나 심한 갈등이 불거지지 않는다. 다만 그다지 나쁘지 않은 시댁, 그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여성―며느리가 겪는 일,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강요받는 어떤 것들을 이야기할 뿐이다. 가부장제도의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모습은 그 속에서 담담하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여성, 특히 기혼 여성이라면 민사린의 불편함과 고민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며느라기」는 ‘극사실주의’ 웹툰이라고도 불렸다. 평범한 일상 이야기로 큰 공감과 파급력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며느라기」는 「82년생 김지영」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매체에서는 ‘소소한 페미니즘’이라 칭하기도 했다. 「며느라기」는 연재 반 년만에 ‘2017년도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했으며, 올해 초에는 종이책으로도 출판되었다. 「며느라기」의 서사 전개에 판타지가 없었던 것처럼,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 수신지는 후기에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고 적고 있다. 여성으로서, 또 여성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글 원춘식 / 글 이새보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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