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건너오거든 밥은 먹여 보내라”
이철수 선생님은 팔십년대에 판화를 통해 사회변혁운동에 힘쓴 탁월한 민중 판화가로서 이름을 올리셨습니다. 80년 후반에 무위당 선생님의 권유로 충북 제천 박달재 아랫마을로 거처를 옮겨 자급자족형 농사를 지으며 개인의 성찰과 자연에 대한 관조, 생명의 본질에 대한 깊은 사유를 목판화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생을 긍정하는 그림과 간결한 글이 담긴 선생님의 작품에는 울림이 크고 여운이 긴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이철수 선생님은 작년 9월 헝가리에서 두 달 동안 판화전을 열었으며 올해는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6개 유럽 주재 한국문화원에서 판화전을 갖습니다.
반갑습니다. 날씨가 꽤 쌀쌀해졌습니다. 털신 신고 집 마당에서 하루 종일 소나무 전지작업을 하다가 강연 시간 맞춰 부랴부랴 왔습니다.
우리 부부는 농사일을 일상으로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김장철이 되면 젓갈 빼고는 모든 재료를 농사지은 걸 갖고 김치를 담글 수 있고, 수확한 콩으로 된장, 고추장도 담글 수 있고···. 그렇게 자급자족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죠.
오늘이 충주·제천무위당학교 1기 강좌를 마무리하는 날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마무리를 잘 해야 이번 강좌로 끝내지 않고 이후에도 강좌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평소 갖지 않던 특별한 책임감을 갖게 되는군요.
오늘 주제는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주제입니다. 장일순 선생님 얘기잖아요. 장 선생님이 세상 떠나신지 2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제가 40대에 들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떠나셨거든요. 20대 말에 처음 선생님을 뵙게 됐고, 20여 년 동안 선생님을 적잖게 뵐 수 있었는데, 선생님을 뵐 때마다 너무 좋았습니다. 그 좋았던 기억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살면서 선생님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잘 몰랐어요. 돌아기신지 20년 지나면서 장일순이란 이름이 내 삶의 화두가 돼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기 오시기 전까지 무슨 일을 하셨나요? 얼굴만 봐서는 뭘 하시는 분들인지 잘 모르겠는데, 저는 요즘처럼 그림을 그리지 않고 2년쯤 놀 때는 농사짓는 사람처럼 삽니다. 실제로 농사를 꽤 많이 짓고 있습니다. 그저께 콩을 털었습니다. 콩을 기를 때 순을 쳐주어야 하잖아요. 하도 잘 자랐기에 평소보다 한 단을 더 달았어요. 그랬더니 쭉정이가 너무 많이 생겼어요. 아내가 그것을 채로 골라내느라고 여간 고생을 많이 한 게 아니에요. 욕심을 내서 낭패를 당한 거죠.
우리 부부는 농사일을 일상으로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김장철이 되면 젓갈 빼고는 모든 재료를 농사지은 걸 갖고 김치를 담글 수 있고, 수확한 콩으로 된장, 고추장도 담글 수 있고···. 그렇게 자급자족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죠.
‘선생님은 실용적인 지혜도 가르쳐주시는 분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시골에 내려와서 집터만 확보를 해서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무위당 선생님이 건너오셨어요. 저의 집을 둘러보시더니 대뜸 “빚 내서 땅을 사라”고 하시는 거예요. 사실 저에게 시골생활을 선택하게 하신 분이 선생님이셨어요. 제가 시골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내 가까이 와서 살아라”고 하시면서 원주에서 가까운 귀래에 자리를 찾아주시려고 애쓰셨는데 여의치 않아서 지금 사는 곳을 찾아주셨어요.
선생님은 제가 농사를 짓지 않고 시골 생활하는 게 걱정 되셨던 것 같았어요. 그날 선생님이 신협 전무 하시는 분을 대동하고 오셔서 빚을 내서라도 땅을 사라고 하셨어요. 당시 제 느낌으로는 신협 전무님에게 “이 친구가 땅을 사면 돈을 빌려줘라”고 언질을 주시는 것 같았어요. “자네는 성정(性情)이 돈을 모으는 것은 할 줄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빚을 지면 갚기는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빚을 내서 처음으로 논을 샀어요. 선생님 예상이 맞았어요. 빚을 내고 나니까 열심히 벌어서 갚게 되더라고요. 그 뒤로 재미가 들어서 지금 가지고 있는 논과 밭을 빚을 내서 사고 갚아나갔어요. 이제는 제가 충분히 농사지을 만큼 땅이 있어서 땅을 더 살 일은 없지만, 선생님이 자산을 늘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기도 하시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선생님이 그 지혜를 빌려주시지 않았으면 저는 여전히 땅을 안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됐을지도 몰라요. 선생님이 그 얘기를 해주시기 전까지는 땅을 사는 것을 범죄라고 생각했어요. 땅 투기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웃에 살다가 이사를 가시는 어르신이 계셨는데 이 분이 저에게 “내 밭을 당신한테 팔고 떠나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싸게 줄 테니 꼭 사라”고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제안이었는데 그때는 과하게 땅을 사는 게 범죄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생님이 땅을 사라고 했을 때는 별 거부감이 없었어요. 스승이라는 존재가 그런 거더라고요. 어제까지만 해도 땅 투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선생님이 사라고 할 때는 그래야 하나보다 하고 샀어요. 역시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으니까 좋더군요. 그 동네를 떠날 일이 없어진 거죠. 동네 할머니들이 지나가면서 제가 논을 샀다는 얘기를 듣고 “이제 이 선생이 우리 동네 사람 되었네”라면서 좋아하셨어요.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좀 더 깊게 하는데도 도움이 되었어요. 선생님과 이런 관계를 가지면서 선생님은 막연한 지혜, 철학적인 가르침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게 아니고 실용적인 지혜도 주시는 분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선생님 철학이 굉장히 실용적이라는 생각을 했죠. 그것이 두고두고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선생님의 가르침의 방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선생님은 당신의 귀중한 시간을 사람들을 위해서 온통 내주셨어요.
대개 우리들은 선생님들에게 열성적인 지혜, 철학적 깊이가 있는 언어, 참여하는 통찰, 이런 것들을 기대하잖아요. 무위당 선생님은 언어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를 쓰셨지 어려운 표현을 쓰시는 법이 거의 없었어요.
제가 무명화가 시절에 이현주 목사님으로부터 현금을 제일 많이 얻어 썼어요. 목사님이 제 작업실에 오시면 당신이 받은 원고료를 봉투째 슬그머니 놓고 가셨어요. 제가 늘 받기만 해서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면 “잘 받는 사람이 주기도 잘 준다고 하더라.”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남한테 갚으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장일순 선생님에게서 똑같은 얘기를 들었어요. 장 선생님은 “앞으로 받고 옆으로 주거라”라고 말씀하셨어요. 남한테 갚으라고 얘기하는 건 좀 말이 길잖아요. 속으로 ‘지혜가 깊을수록 짧게 이야기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그림에다가 짧은 글을 많이 넣는 이유도 짧을수록 지혜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가능하면 짧고 압축적인 지혜를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표현들을 쓰고 있는데, 지혜도 가능하면 선생님처럼 아주 쉬운 말로 서로 이야기 하듯이 일상적인 언어들로, 특히 생활 속에서 실감할 수 있는 언어들로 오묘한 지혜를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
오늘 제 강의의 주제가 ‘우리의 삶과 사회를 돌아보다’인데요, 사실 무슨 얘기를 하든 지 이 주제와 관련된 얘기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삶과 사회’ 이 두 가지를 빼면 우리 생활에 뭐가 있겠어요. 뒤로 자빠지든 앞으로 엎어지든 자신 속에 다 있는 이야기일 테니까요. 그런데 대개는 쉽지 않은 언어들이 우리 앞에 참 많이 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2년 동안 아무 것도 안하고 놀았거든요. 원불교 100주년을 기념해서 대종경이라고 하는 경전을 가지고 연작 작품을 하게 됐는데, 경전을 읽다가 너무 좋아서 푹 빠졌어요. 100주년이라고 해서 100점만 하기로 했는데 200점을 한 거예요. 원불교 200주년 기념까지 한 셈인데 원불교 측에서도 좋아하셨어요. 작품을 다 하고 났더니 탈진을 해서 도저히 더 그림 그릴 기운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한 일 년 쉬었는데 쉬니까 참 좋은 거예요. 쉬는 김에 계속 쉬자고 해서 2년이 되었어요. 이번 겨울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원불교 작품을 마치면서 ‘선생님이 살아계셨으면 이 작품들을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어디까지 왔는지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숙제 검사를 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선생님을 그리워했지만 떠나가신 선생님을 다시 모실 방법이 없잖아요. 선생님께 보여드릴 수가 없게 되어 아쉬웠지만 그 대신 세상이 있는 거지요. 생각해보면 세상이 어떻게 공감하는지, 공감의 이유가 뭔지를 확인하는 그런 일들이 제가 세상 살면서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니까요.
선생님이 저의 화두가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선생님에 관한 모든 기억들이 다 그대로 제 삶의 갈피갈피마다 자꾸 떠오르게 되요. 선생님과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아주 새삼스럽게 말이죠.
선생님은 당신의 많은 시간을 참 많은 사람을 위해서 온통 내주셨어요. 저는 살면서 제 시간이 늘 아까웠거든요. 이런 자리에 와서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도 시간 낭비다 라고 생각을 할 때가 있기도 해요. 저는 직업상 책상머리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책 읽고 해야 밥벌이가 되고 제 것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선생님은 당신 것이라고 할 것이 없이 평생을 사셨어요. 저는 선생님 큰 아드님보다 그저 몇 살 더 많은, 따지고 보면 선생님은 아버지 같은 어른이셨거든요. 그런데 저 같은 젊은 친구들이 선생님을 찾아가는데 아무 제약이 없었어요. 찾아가면 그저 반가워해주시고, 시간 내서 밥도 사 먹여주셨어요. 원주에 계신 선생님 제자나 후배들에게 “철수 건너오거든 밥은 먹여서 보내라”고 한마디 하셨는데, 저는 그 이후로 밥값을 한 번도 내본 적이 없어요. “앞으로 받고 옆으로 갚아라”라는 그 간단한 말씀 속에 참 많은 이야기를 담으셨던 것 같아요. “철수 건너오면 밥은 먹여서 보내라” 딱 한마디 하셨는데, 저에게 선배님 되시는 선생님의 그 많은 후배와 제자 분들이 절대로 밥값을 못 내게 하셨어요. 저는 속으로 ‘아, 원주는 어법이 다르구나. 구질구질하게 얘기하는 게 없는 곳이구나’라고 느꼈어요. “철수가 무명화가잖아. 당연히 돈이 없을 것 아니야. 그러니까 원주에 와서 밥 한 그릇이라도 먹으려면 눈치도 보이고 힘들기도 할 테니까 자네들이 알아서 밥 좀 사 먹여서 보내.” 보통은 이렇게 말하잖아요. “밥은 먹여 보내라”라고 하신 그 간결하고 단순한 말씀이 참 좋았어요.
한번은 가격이 싼 밥을 먹으면 밥값을 못 내겠다 싶어서 원주 시내에서 식당을 하는 선생님 제자 분 댁에 아내와 함께 가서 밥값을 낼 작정을 하고는 그 집에서 가장 비싼 메뉴를 시켰어요. 하도 양을 많이 주셔서 남긴 것을 싸달라고 했어요. 이쯤 되면 돈을 안 받을 리 없다고 생각한 거죠. 음식 보따리를 들고 계산대에 갔는데 또 돈을 못 내게 하시는 거예요. “오늘은 밥값을 낼 작정하고 일부러 비싼 걸 시킨 겁니다”라고 말했더니 선생님 제자인 주인이 “나는 자네처럼 집에서 손님을 못 받는 사람이니까 가게에서 자네를 대접할 수밖에 없는 형편 아닌가. 자네가 어떤 음식을 먹었던 지간에 돈을 받을 수 없네”라고 딱 잘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 일까지 겪고 난 뒤로는 돈 내는 것은 아예 포기했어요. 저에게 밥을 먹여주신 선배 분들이 지금은 연세가 많많이 드셨어요. 다들 보신탕을 좋아하셔서 요즘은 제가 가끔 식사대접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저도 원주에 가서 밥은 사드릴 수 있게 된 거죠. 이거 참 괜찮은 계산법인 거 같아요. 며칠 전에 선배님들께 전화 드려서 “겨울에 보신탕 드시는 것도 좋으세요?” 하고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그럼, 눈 오는 날 보신탕도 괜찮아”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조만간 선배님들 뵈러 원주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오직 선생님을 화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선생님 댁을 드나들었던 20여 년 동안 선생님은 아주 가끔씩 붓글씨와 난초 그림을 주셨어요. 선생님에게 처음 받은 난초 그림은 꽃이 크게 그려져 있고, 손톱만한 잎사귀 두 장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었어요. 꽃은 크게 그리고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하는 잎과 뿌리 부분은 작게 그리는 것으로 “자네는 꽃처럼 아름답고 크게 피게 될 거야”라는 뜻으로 그리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은 어렵게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을 보내고 상처 많이 받고 살아온 젊은 친구를 위로 하고 싶으셨던 것 같았어요.
제가 제천에 살기 전에는 경북 의성 깊은 산골에서 살았어요. 그때도 선생님이 그곳까지 오셨어요. 제가 세 들어 살고 있는, 당신보다 연배가 적은 시골 농사꾼인 집주인에게 절을 올리시고는 당신 자식을 부탁하듯이 “우리 철수 잘 부탁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말씀하셨어요. 선생님은 그러신 분이셨어요.
어느 해에 제 아내에게 건네주신 작품이 바람에 꽃이 아주 예쁘게 휘날리는 난초였는데, 유곡천향(幽谷天香: 서화집 3권 137쪽)이라고 쓰셨어요. ‘깊은 골짜기에 하늘 향기’라는 뜻인데 그걸 건네주시면서 “철수 같이 못난 사내 데리고 사느라 고생 많은 자네가 깊은 골짜기에서 향기를 뿜는 난초 같은 존재이니 이걸로 위로를 삼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셨어요. 제가 아내에게 못하는 위로를 대신 해주신 것 같아요.
선생님은 제 삶의 대목 대목에서 가끔씩 글씨를 한 장씩 써 주시면서 그 글씨의 뜻을 늘 마음속에 새기게 해주셨어요. 선생님 생전에 제 집에 가장 오랫동안 걸어둔 글씨는 급류수조(急流垂釣)입니다. ‘급류에 낚시를 드리우면 성질 급한 놈이 미끼를 문다’는 뜻으로 잠깐 자기의 성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욕심을 드러내면 목숨을 잃는다는 그런 내용이에요. 30대 후반까지 선생님께서 주신 그 글씨를 안방 문 위에 걸어놓고 드나들 때마다 그걸 보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우편물로 선생님이 글씨를 새로 보내신 거예요. ‘불취어상(不取於相)’이라고 쓴 글씨였어요. 금강경에 있는 구절인데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니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뜻이에요. 선생님이 이런 글씨를 갑자기 우편물로 보내신 것이 당혹스러워서 이현주 목사님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만물일화(萬物一華: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한 송이 꽃과 같다.)라고 쓴 붓글씨 한 점을 나도 받았다”고 하시더라고요. 무위당 선생님은 얼마 후에 병원에 입원을 하셔서 그 길로 돌아가셨어요. 아마 선생님은 당신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시고는 글씨를 써서 몇몇 사람들에게 마지막 편지처럼 보내주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철수야, 너는 남은 인생은 이것을 보고 살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이제는 아무 때나 불쑥 가서 밥 얻어먹고 하소연도 하고 그럴 수 있는 자리도 기회도 없어졌어요. 불취어상이라는 글씨 하나가 남아있는 거죠. 그런데 저는 불취어상을 화두로 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오직 선생님을 화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 존재, 그 자체가 큰 가르침이었어요.
무위당 선생님을 어떻게 기릴 것인가 이런 이야기들을 할 때도 저는 우리 삶에서 내 안에 와 있는 무위당을 우리가 어떻게 살지 생각해보자고 자주 말합니다. 그냥 그 존재를 온통 받아 안고 싶었어요. 선생님의 화신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제가 사람 복이 있어선지 훌륭한 어른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선생님은 그 어떤 어른과도 다르셨어요. 진정한 의미로 우리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왜 단 한 분의 선생님이냐 하면, 선생님은 절대로 가르치려고 들지 않으셨어요. 그냥 선생님 존재, 그 자체가 가르침이었어요. 어느 날 선생님 댁에 갔더니 어떤 분이 그동안 선생님 글씨를 많이 받아갔다고 감사의 인사로 돈 봉투를 놓고 가셨어요. 선생님이 돈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잠바 주머니에 넣으시고는 “나와 어디 좀 가세” 그러시는 거였어요. 따라 가보니 저도 안면이 있는 분이 일하는 작업실이었어요.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이 그분에게 시키지 않아도 될 심부름을 시키셨어요. 그분이 나가자 작업실 서랍 하나를 여시더니 돈 봉투를 집어넣고 닫으셨어요. 그 분이 돌아오니까 잠시 얘기 나누다가 물 한 모금 얻어 드시고는 “철수 하고 갈 데가 있어서 일어나야겠네” 하시고는 그 집을 나왔어요. 저는 두 번이나 똑같은 경험을 했어요. 그러자 문득 직업도 없는 선생님은 무얼 갖고 사실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선생님에게 여쭈어 봐도 단 한 번도 답을 주지 않으셨어요. 나중에 사모님에게 “여쭤봤어요. 사모님이 웃으시면서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하잖아요”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셨어요. 그게 끝이었어요.
서울에서 선생님이 전시회를 여셨는데, 제가 전시장을 지키는 당번이었거든요. 그때는 3김의 시대였어요. 전시장에 있으면서 3김 모두에게 선생님 작품을 팔았어요. 정계 거물인 3김과 인사도 하고 작품 값으로 돈도 받고 했어요. 통장에 다 적립을 해서 선생님에게 보고하려고 하니까 보시지도 않고는 “그거 한살림 주게” 그러셨어요. 그때 한살림이 아주 어려웠을 때였어요. 그게 끝이었어요. 저는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도대체 어디에 화수분이 있어서 생활하시는 것인지. 지금도 모르죠. 선생님은 평생을 그렇게 사실 수 있었던가 봐요. 선생님은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다 거저 주고 사셨는데 저는 판화 찍어서 돈하고 바꿔야지만 살 수 있는데···. 이건 서로 비교가 안 되잖아요.(웃음) 나도 선생님처럼 살고 싶은데 다 그냥 주고나면 나는 뭘 먹고 사나 하는 그런 계산이 생기더라고요. 선생님의 화수분은 ‘그것이 알고 싶다’로 남겨두고 있는 것이죠(웃음)
선생님의 가르침처럼 어려울 때는 받고 여유 있을 때는 나누고 하는 게 세상 원리잖아요. 그런데 요즘 세상은 그 원리가 작동하지 않게 돼버렸어요. 내 것을 챙겨놓지 않으면 사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어 지는 거죠. 오늘도 일하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생활비 지원을 안 해준다고 어머니를 살해한 아들 부부 뉴스가 나오더라고요. 사람들은 참 인륜을 저버린 나쁜 사람이라고 얘기하지만, 자기 부모를 살해한 사람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가난 앞에 장사 없는 게 사실이잖아요. 아무 것도 없으면, 정말 막막해지면 남의 목숨도 빼앗을 수 있는 게 사람이에요. 우리 시대에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사납고 차가울 정도로 끔찍한 것이죠. 요즘처럼 도시적인 삶을 사는 세상에서 내 수중에 현금이 없으면 그 자체가 지옥인거죠. 어디다 손 내밀 때도 없어요. 저는 이럴 때 장 선생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힘이 되셨는지 생각하게 되요. 선생님에 관한 일화는 꽤 많이 알려져 있죠. 고향 후배가 태권도장이 안 돼서 걱정이라니까 아예 도복하나 갖춰 입으시고는 매일 태권도장으로 출근해서 앉아계셨다는 이야기 알고 계시죠? 선생님은 머리가 굉장히 좋으셨던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몸으로 부조하신 거죠. 그러니까 선생님은 관념, 이런 거 없으신 분이셨어요. 아주 실질적으로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챙겨 주신 선생님이셨어요.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노라하는 지성들에게는 은밀하게 깊은 내공을 보여주셨어요. 그러니까 당대의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선생님 앞에 와서 모두들 고개를 조아리고, 어린 아이처럼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감동받고 그런 게 아니겠어요.
리영희 선생님 별명이 ‘말갈’이에요. 북방민족의 후예처럼 아주 기개 있고 위세가 당당하시거든요. 그런데 무위당 선생님과 두 분이 앉아 계실 때는 완전히 말 잘 듣는 착한 동생인 거예요. 완전히 꼬리를 내리고 장 선생님 앞에서 다소곳하고 말도 고분고분하게 하는 거예요. “천하의 리영희 선생이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고 농담 삼아 여쭤본 적이 있어요.(웃음)
“초면에 몇 마디 안 해봤는데 그릇이 다르더라”는 얘기를 하셨어요. 자신은 신문기자 생활을 해서 분석적이고, 사회를 직선적으로, 구조적으로 해석하는 면이 강한데, 세계정세에 대해 말씀드리니까 무위당 선생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두 마디 던지는데 전체를 아우르면서 종합적이고 총괄적으로 세상을 보고, 미래를 통찰하는 혜안이 너무나 정확하고 지혜로워서 놀라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리영희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이건 내가 감히 못 따라갈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삶의 자세인데, 그분의 삶이 얼마나 철저합니까. 철저하면서도 이론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생활인으로 하신단 말이에요.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그분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단 말이에요. 이런 분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내가 자청해서 동생 하겠다고 했어요”라고요.
“자네를 만나면 굉장히 좋아하실 분을 만나러 원주에 가세”
저를 장 선생님에게 소개해준 분이 이현주 목사님이세요. “자네를 만나면 굉장히 좋아하실 분이 있는데 그 분 만나러 같이 가세” 하셔서 봉산동 댁으로 따라 갔어요. 가보니까 선생님 댁에 제 작품 도록이 있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어디서 구하셨냐?”고 여쭈었어요. 김지하 선생 장모인 박경리 선생이 갖다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해요. 전시회 팜플릿을 김지하 선생이 장 선생에게 직접 주었거나, 장모인 박경리 선생에게 준 것을 장 선생님이 받은 것일 수도 있겠죠. 이렇게 해서 저는 선생님 문중에 편입하게 되었죠. 그 문중에 들어가면 앞으로 받고 옆으로 갚아야 하고, 핏기 없는 발언, 관념적인 발언, 삶과 동떨어진 발언을 해서는 안 되는 집안이었어요. 찾아보면 함께 다 같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는데 부박한 시대의 흐름에 자기 생각 없이 따라가는 삶은 이 문중에서는 용납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한살림에서 유기농 먹거리를 구입하는데 선생님은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선생님은 농사짓는 분들을 귀하게 여기면서 늘 존중해주셨어요. 저는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삶이 참 좋아요. ‘노동에 몰입하는 것처럼 좋은 마음공부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지 오래되었거든요. 매일매일 농사일을 하다보면 어떤 때는 많이 힘들기도 해요. 지금도 손이 너무 아파요. 이렇게 몸이 아픈데, 몸은 고통을 통해서 화두처럼 된다는 걸 느껴요. 우리가 번뇌가 많아질 때가 있잖아요. 그 고민 속에 그냥 몰입이 되면서 고민과 나와의 간격이 없어질 때 그때 마음에 관해서 좀 더 알게 되고 몸이 극도로 지쳐있거나 힘들어질 때 몸에 관해서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제 그림들 속에 이런 이야기들을 담아놓은 것들이 있어요.
‘그 저녁 일월 곤륜도’(1993년 作)라는 그림이 있는데 한 남자가 해와 달이 한꺼번에 떠있는 들판에 서 있는 작품이에요. 제가 이 그림을 그리던 무렵에는 일을 화두처럼 들고 살았던 때였어요. 내가 쓸 수 있는 힘을 다 쓴 어느 날 저녁에 수레를 집으로 끌고 가는 일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기운이 다 빠져 있는 상태였는데, 하늘을 보니 해가 막 지려고 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 순간 묘하게도 해와 달이 함께 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힘든데 뭔가 고요함 같은 게 있었어요.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보신 선생님이 “이런 걸 봤어?” 하시고는 저를 쿡 찌르시고 지나가셨어요. 제가 마음을 살피면서 공부하는 자세를 갖고 사는 것을 칭찬 받은 거죠. 마치 선승들이 말 안 하고 몽둥이질을 하거나 의미 없는 감탄사 같은 소리를 내면서 깨우침을 주듯 선생님도 가끔 그런 의미의 표현을 하셨는데 그게 참 좋았어요. 스님들 만나서 정색을 하고 선 수행에 관한 얘기를 할 때보다 선생님과 그런 식으로 문답할 때가 훨씬 더 좋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런 일을 같이 할 사람이 사라져 버린 거죠.
선생님은 스스로 큰 존재임을 자처하신 적도 없고, 호사스럽게, 위엄 있게 자신을 보여주신 적도 없으셨어요. 가능하면 평범하게 그냥 그렇게 사셨는데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고 싶어 하고 따르고 싶어 하잖아요. 제가 선생님에게 받았던 여러 가지를 쭉 정리하다 보니까 낙관이 없이 글씨만 있는, 크기가 작은 작품이 두 점 있는데 하나는 ‘평범(平凡)’이라고 쓴 것인데 왜 이게 저한테 와 있는지 몰라요. 또 하나는 ‘제일체심(除一切心)’인데 ‘일체 마음을 다 지운다’는 뜻이죠. 마음 공부할 때 많이 듣게 되는 얘기인데, 한참 동안 그 글씨를 식탁 옆에 걸어 놓고 밥 먹을 때마다 쳐다보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라는 의미로 읽혀지면서 “철수 건너오면 밥은 먹여 보내라”고 하는 말씀이 떠오르기도 하고, 한살림 조합원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밥이 하늘입니다’라는 밥그릇 그림도 떠올랐어요.
내 그림이 힘든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선생님을 떠올릴 때마다 방석 깔고 앉아서 하거나 날 잡아 놓고 분위기 잡으면서 하는 그런 거 말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현실의 구체적인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충분히 인정하는 속에서 틈틈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마음 챙기는 일을 다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도 장일순 선생님의 삶을 기회 있을 때마다 접해보시기 바라고, 그분의 존재를 마음에 화두처럼 붙들고 사시면 여러분의 힘든 일상이 한편으로는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면서도, 또 가볍지만은 않은 깊이와 무게를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넉넉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무리 말씀을 드리면 제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선생님의 초상을 완성하는 일이에요. 오랫동안 선생님 사진을 작업실에 붙여놨는데 20년 넘도록 마음에 드는 초상화 작품을 못 만들었어요. 제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잘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 초상을 잘 그리고 싶은데 참 어렵더라고요. 권정생 선생님 초상도 정말 하고 싶은데 여태 안 그려지더라고요. 몇몇 선생님 초상은 제가 죽기 전에 무조건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위당 선생님 초상은 꼭 제가 그릴 거예요. 제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제 그림 중에 ‘잘 있거라 나는 간다’라는 화제(畫題)가 걸린 작품이 있어요. 단풍잎 한 장 그려놓은 그림인데, 어느 날 남편을 잃고 혼자 4남매를 키우신다는 아주머니가 장문의 편지를 보내셨어요. 제 그림이 위로가 되었다면서 그 그림을 보면서 울면서 하염없이 걸었다고 쓰셨어요. 저는 그 그림을 농담처럼 그렸는데, 그 편지 받고는 너무 부끄러워서 그림을 못 그리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많은 분들이 참 열심히 살면서, 절박하게 자신의 삶과 만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쪼록 어려운 시기에 장일순 선생님 같은 어른들이 저에게 참 좋았듯이, 저도 그림을 통해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위로를 드리고, 따뜻한 손길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네요. 무위당학교에 초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판화가 이철수 선생님 충주 · 제천 무위당학교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