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8-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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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배고픈 사람과 함께 하라(處與寒民)’ 수원종로교회 안희선 목사님 수원 화성행궁을 바라보고 있는 수원종로교회는 1899년에 수원지역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민족운동가들이 설립한 수원의 첫 개신교회로 12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20년째 이 교회 담임목사로 봉직하고 계신 안희선 목사님은 1974년에 무위당 선생님을 처음 만나 “깨진 자들과 함께 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목회활동을 해 오신 분입니다. 인터뷰를 약속한 전날 밤 무위당 선생님의 추억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는 목사님과 2시간 넘게 진행된 대담에는 사모님과 심상덕 무위당기념관장님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교회가 화성행궁에 인접해 있어서일까요? 평온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1977년에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73년 전도사 시절 처음 목회지가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시골 마을의 작은 교회였습니다. 어느 날 초상이 나서 장례차가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돌아가신 분이 고등학교 은사님이셨어요. 매우 엄한 분이었는데 제가 신학대학에 합격하고 교무실에 갔더니 그 선생님 우리 교회는 1899년에 세워진 수원의 첫 개신교회입니다. 고종 27년인 1897년에 서울에 장로교인 새문안교회와 감리교 정동교회가 세워진 뒤 2년 후에 건립되었죠. 최초의 교회는 화성 안 고시동이라는 동네에 있었습니다. 처음엔 교회이름을 북수리예배당이라고 지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기독교를 ‘사교(邪敎)’라고 배척했는데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행궁 마을에 기독교가 들어왔다는 것은 당시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 되자 교회 안에 ‘삼일학교’란 이름의 학교를 세워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시켰습니다. 3·1만세운동 때는 횃불시위도 했습니다. 만세운동이 실패하자 지하로 숨어서 투쟁하였고, 일부는 만주로 가서 독립군관학교를 세워 무장투쟁을 했습니다. 1907년에 이 자리로 이사를 와서 1932년에 벽돌로 교회를 지었고 지금 교회 건물은 1969년에 신축했습니다. 건물이 50년이 되다보니 많이 낡았습니다. “깨진 자들과 함께 살아라” 민족정기가 서려있는 유서 깊은 교회이군요. 이 교회로 오시기 전에 원주에서 목회활동을 오랫동안 하셨죠? 제 고향은 강원도 춘천입니다. 부모님 고향이 황해도 재령인데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에 북한에서 살 수 없어서 춘천으로 월남하셨습니다. 1948년에 저를 낳고 6·25 때 피난 갔다가 정착한 곳이 원주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지금 원주의료원 뒤 산동네에서 보냈고, 초등학교는 일산국민학교 명륜 분교를 다녔습니다. 1학년 때 원주 남산 수원지 자리에서 천막을 치고 가마니 깔고 입학식을 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원주에서 나왔고 대학은 서울의 감리교 신학대학을 다녔지만 집이 원주라서 주로 원주에 많이 있었습니다. 군대도 원주에서 마쳤습니다. 사모님 : 저는 1969년부터 90년까지 원주기독병원 간호사로 근무했습니다. 신학대학 졸업하시고 목회활동을 처음 시작하신 곳은? 1977년에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73년 전도사 시절 처음 목회지가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시골 마을의 작은 교회였습니다. 어느 날 초상이 나서 장례차가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돌아가신 분이 고등학교 은사님이셨어요. 매우 엄한 분이었는데 제가 신학대학에 합격하고 교무실에 갔더니 그 선생님이 악수를 하시면서 깍듯한 존댓말로 “훌륭한 목사님이 되셔야 합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이 분이 돌아가시면서 무위당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신 거예요. 운구행렬을 따라서 묘소에 갔는데 눈이 부리부리하면서도 점잖은 어른이 상주에게 아주 자상하게 장례 예법을 일러주시는 데 그 모습이 무척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저 분이 누굴까?’ 궁금해서 옆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장일순 선생님이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선생님은 지역에서 존경 받아온 분이라 어렴풋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희한하더라고요. 제가 남자 어른을 무서워하는 편이고, 선생님 연세가 저보다 스무 살 위인데도 조금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얼마 뒤에 선생님 댁을 처음으로 가게 됐습니다. 제가 스스로 찾아간 게 아니라 선생님이 “어려워하지 말고 우리 집에 같이 가자”고 하셔서 간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모님이 끓여다주시는 차를 마시면서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예수는 깨진 자 들과 함께 살았잖느냐? 모름지기 목사는 깨진 자들과 살아야 한다.” 그날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인데요, 갑자기 죽비로 등짝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보게 되더라고요. 그 뒤부터 선생님 댁을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힘들고 풀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댁으로 달려갔습니다. “선생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고 여쭈면 “글쎄다”하시면서도 언제나 명쾌한 해답을 주시곤 했어요. 선생님 말씀 들으면 얽힌 실타래가 술술 풀리는 것 같았어요. 그날 묘소에 온 사람들이 모두들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극진히 모시는데도 선생님은 조금도 거만한 티를 내지 않고 소탈하게 사람들을 대하시더라고요. 속으로 ‘저 분은 정말 존경할만한 분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묘소에서 내려올 때 선생님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사모님 : 목사님은 사람들과 말도 잘 붙이고 금방 친밀해지는 성격인데도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선지 유독 남자 어른을 어려워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위당 선생님은 하나도 어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만큼 선생님이 자상하셨기 때문일 거예요. 참으로 희한하더라고요. 제가 남자 어른을 무서워하는 편이고, 선생님 연세가 저보다 스무 살 위인데도 조금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얼마 뒤에 선생님 댁을 처음으로 가게 됐습니다. 제가 스스로 찾아간 게 아니라 선생님이 “어려워하지 말고 우리 집에 같이 가자”고 하셔서 간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모님이 끓여다주시는 차를 마시면서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예수는 깨진 자 들과 함께 살았잖느냐? 모름지기 목사는 깨진 자들과 살아야 한다.” 그날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인데요, 갑자기 죽비로 등짝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보게 되더라고요. 그 뒤부터 선생님 댁을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힘들고 풀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댁으로 달려갔습니다. “선생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고 여쭈면 “글쎄다”하시면서도 언제나 명쾌한 해답을 주시곤 했어요. 선생님 말씀 들으면 얽힌 실타래가 술술 풀리는 것 같았어요. 무위당 선생님은 목사님의 멘토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멘토라기보다는 아버지 같은 분이셨어요. 제가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을 때 선생님을 찾아뵙고 “좋은 말씀 하나 해주세요”하고 부탁드렸어요. 그랬더니 ‘처여한민(處與寒民)’을 써 주셨어요. ‘춥고 배고픈 사람과 함께 하라’는 뜻인데, ‘가난한 사람과 함께’라는 성경 말씀과 같은 의미죠. 이 글씨를 받은 날은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자’고 다짐한 날이기도 합니다. ‘처여한민(處與寒民)’은 저의 운명이자 저의 어린 아이들에게는 뼈아픈 말이기도 했습니다. ‘처여한민(處與寒民)’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나요? 사모님 : 제 큰딸이 3학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가훈을 써 오라는 숙제를 내줬어요. 목사님이 ‘처여한민(處與寒民)’을 한글로 풀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라고 써서 줬어요. 그랬더니 담임 선생님이 보시고는 “이게 뭐냐? 너희집 가훈은 다른 집하고는 많아 틀리네. 이상한 집이다” 라고 말을 한 거예요. 이 말이 딸애의 가슴을 아프게 한 거 같아요. 선생님이 오셨을 때 딸애가 “할아버지, 우리 집 가훈 좀 바꿔주세요,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들 하고만 살아서 너무 어렵고 힘들어요”라고 부탁하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신 선생님이 고개를 돌리시고 아무 소리 안하시고 계시다 가셨어요. 지금은 무실동이 아파트와 고층빌딩이 즐비한 신시가지로 변했지만 당시엔 논밭과 과수원이 있는 원주에서 가장 가난한 농촌마을 이었어요. 아내가 막내를 낳았을 때 선생님 내외분이 집에 오셨어요. 사모님이 가난한 시골 목사의 생활이 말이 아닌 걸 보시고 무척 마음 아파하셨어요. 두 분이 가시고 나서 보니까 바가지가 엎어져 있는 거예요. 바가지를 들쳐보니까 돈 봉투가 놓여있었어요. 아내가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사모님 : 우리 아이들이 무실동에 살면서 학교는 일산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가난한 무실동 아이들이 홀대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 집 애들도 많이 속상해 해서 새로 개교한 북원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는데 거기서도 우리 아이들을 차별해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그땐 비가 오면 교회에 빗물이 새서 지붕에 비닐을 덮고, 바람에 날리지 못하도록 벽돌을 올려놓고 예배를 볼 정도였거든요. 선생님이 써 주신 ‘처여한민(處與寒民)’을 표구해서 액자에 넣었는데 절반쯤 무너진 집이어서 액자를 걸 데도 없었어요. 그래서 밖에다 걸어놨어요. 어느 날 선생님이 오셔서 보시더니 “야, 이게 여기 걸려 있구나. 네 집에서 이게 제일 내 맘에 든다”고 말씀 하셨어요. 사모님 : 제 큰딸이 3학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가훈을 써 오라는 숙제를 내줬어요. 목사님이 ‘처여한민(處與寒民)’을 한글로 풀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라고 써서 줬어요. 그랬더니 담임 선생님이 보시고는 “이게 뭐냐? 너희집 가훈은 다른 집하고는 많아 틀리네. 이상한 집이다” 라고 말을 한 거예요. 이 말이 딸애의 가슴을 아프게 한 거 같아요. 선생님이 오셨을 때 딸애가 “할아버지, 우리 집 가훈 좀 바꿔주세요,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들 하고만 살아서 너무 어렵고 힘들어요”라고 부탁하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신 선생님이 고개를 돌리시고 아무 소리 안하시고 계시다 가셨어요. 그 뒤로 무위당 선생님이 가훈을 새로 써 주셨나요? 제가 대학원 다닐 때는 데모하고 난리치던 시대였거든요. 시국 문제에 대해 선생님과 얘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그럴 때마다 시골에 계신 분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훤하게 잘 알고 계시고, 국제정세도 꿰뚫고 계셔서 깜짝 놀랄 때가 많았어요. 선생님은 박정희에게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정치군인들은 문제지만, 그렇다고 군인 전체를 싸잡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선생님께 가훈을 새로 써 달라고 한 제 딸은 가난한 목사의 사모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댁 밥 많이 축냈습니다 부론에서도 목회활동을 하셨죠? 무실교회로 오기 전이었죠. 원주에서 부목사를 하다가 부론교회로 갔는데 부론교회 현판을 선생님이 써 주셨습니다. 지금은 예배당을 새로 지었지만 현판은 남아있을 겁니다. 사모님 : 부론교회에 있을 때 목사님이 가끔 아침 일찍 일어나 원주에 갈 채비를 하시는 거예요. 식사도 안 하고 어디 가려고 하냐고 물으면 봉산동 선생님 댁에 간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 양반이 선생님을 보고 싶어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했죠. 그때만 해도 부론은 원주에서 먼 거리였어요.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면 불현듯 선생님이 보고 싶어질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원주로 나가는 첫 버스를 타고 봉산동 댁으로 갔어요. “선생님이 보고 싶어 일찍 왔습니다” 라고 말하면 사모님이 석유곤로에 밥을 해서 아침상을 차려주셨어요. 선생님과 겸상할 때도 있었고, 혼자서 먹을 때는 선생님이 흐뭇한 표정으로 제 밥 먹는 모습을 바라보셨죠. 선생님과 나눈 대화 중에서 기억에 남는 말씀은? 부론 교회에서 원주 무실교회로 왔을 때는 선생님을 거의 매주 만나 지혜로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깨진 자와 함께 하라”, “목사가 목을 뻣뻣하게 하면 모가지가 부러져 죽는다.” “신부와 목사가 목에 힘주고 살다가 죽으면 지옥 맨 앞에 있을 거다. 그러니 기어라.” 이런 말씀이죠. 아,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은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시대를 읽고 미래를 예측하는 혜안이 매우 뛰어난 분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나요? 제가 대학원 다닐 때는 데모하고 난리치던 시대였거든요. 시국 문제에 대해 선생님과 얘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그럴 때마다 시골에 계신 분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훤하게 잘 알고 계시고, 국제정세도 꿰뚫고 계셔서 깜짝 놀랄 때가 많았어요. 선생님은 박정희에게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정치군인들은 문제지만, 그렇다고 군인 전체를 싸잡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1991년 12월에 소련이 붕괴되었잖아요. 선생님은 그보다 2년 전에 소련이 망할 거라는 걸 예측하셨어요. 어느 날 선생님 댁에 들렀더니 “아무래도 소련이 붕괴될 것 같아”라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뜬금없다는 듯이 “선생님, 설마 강대국인 소련이 붕괴되겠어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런데 2년 뒤에 소련이 망하더라고요. 속으로 ‘우리 선생님 정말 대단하시구나’라고 생각했죠. 선생님은 시대를 정확하게 읽을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무위당 선생님과 봉산천 뚝방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신 적도 있나요? 이철수 화백은 환경운동 했던 최한택이라는 목사님이 소개해주었어요. 어느 날 최 목사님 댁에 갔더니 누가 와 있더라고요. 최 목사님이 서로 인사하라고 해서 통성명을 하니 이름이 ‘철수’였어요. 이철수 화 참, 제가 이거 하나 물어볼 게요. 국수 드실 때 국수 값을 누가 계산했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돈이 없으셨으니까 당연히 함께 식사한 분들이 냈겠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절대 아니에요. 국수 값은 늘 선생님이 내셨어요. 아무도 모르게 값을 계산하고 나가셨어요. 선생님 모시고 국수집에 갈 때는 들어갈 때 계산하지 않으면 돈 낼 차례가 오질 않았어요. 누가 국수 값을 계산하려고 하면 선생님이 “내가 다 냈다”고 말씀하셨어요. 심상덕 선생 : 민주화운동 하실 때는 정보기관에서 감시를 했잖아요. 어느 식당에서 누구와 만났고 식대는 누가 냈는지 전부 추적을 당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선생님은 아무리 모진 정권이라도 손님에게 비싼 음식이 아닌 국수 한 그릇 먹인 거 갖고 뭐라고 하진 못할 거라고 생각하신 거죠. 이현주 목사님과 이철수 화백을 선생님께 소개해준 분이 목사님이라고 들었습니다. 부론교회에 있을 때 두 분을 선생님께 소개했죠. 이현주 목사님은 저보다 4살 위인데 신학대학 졸업은 같은 해에 했습니다. 졸업한 이후에도 많은 의지가 되었고 같이 뭉쳐 다닌 적도 있습니다. 당시에 이현주 목사님은 충주에 계셨는데 제가 찾아가서 “형님이 만나면 좋아할 분을 만나러 갑시다. 원주의 노자 장일순 선생님을 만나러 갑시다”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이철수 화백은 환경운동 했던 최한택이라는 목사님이 소개해주었어요. 어느 날 최 목사님 댁에 갔더니 누가 와 있더라고요. 최 목사님이 서로 인사하라고 해서 통성명을 하니 이름이 ‘철수’였어요. 이철수 화백이 결혼하기 전이었고 저보다 나이가 아래니까 저를 형님으로 불렀어요. 그때 이철수 그림을 보니까 뭐 이건 거의 혁명가의 그림이더고요. 돈다발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뭐 난리도 아니었어요. 이현주 목사님과 이철수 화백을 동행해서 선생님 댁에 갔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얼마 전에 전시회를 연 것 까지 알고 계실 정도로 이철수 화백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계시더라고요. 철수에게 “자네 재주가 내 재주보다 낫네.” 그러시더니 “엎드려 살어!”라고 말씀하셨어요. 선생님은 우리 중에서 나이가 가장 적은 이철수 화백을 무척 귀여워해 주셨어요. ‘처여한민(處與寒民)’을 시작으로 마지막에 ‘부처명리(不處名利)’로 저를 꽉 붙들어 놓으셨어요. 언제 원주를 떠나셨나요?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원주 기독병원에 계실 때였습니다. 몰라보게 수척해지셨지만, 의연한 표정으로 “암도 하늘이 내린 벼슬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디 훌륭한 목사님 돼 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 나이가 올해 70이니 제가 선생님보다 더 오래 살았네요. 원주를 떠나신 뒤로는 선생님을 자주 뵙진 못하셨겠네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죠. 1992년쯤으로 기억하는데 선생님이 암에 걸리셔서 수술을 받고 댁에서 요양하실 때였어요. 선생님 뵈러 갔더니 원주 시내에 있는 선생님 후배가 하는 서예실로 데리고 가시 더니 먹을 갈라고 하셨어요. “내가 너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하시면서 써 주신 것이 ‘부처명리(不處名利)’였어요. 다 쓰시고는 “명예와 이익이 있는 곳엔 아예 가지도 마라. 그건 네가 갈 길이 아니다”라고 설명해주셨어요. 제가 한때는 예배당도 크게 짓고 우쭐해지려고 할 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이 이런 저의 마음을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이 말씀을 늘 생각하면서 내가 평생 명예를 받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선생님 글씨를 보면 제가 목회를 잘못하니까 꾸짖음으로 써주신 작품들이 많습니다. 모두 제 자신을 경계하고 반성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세우겠다는 사람에게 “비우라”고 하셨고,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버리라”고 하셨잖아요. 이 말씀은 무위당 선생님이 강조하신 “밑으로 기어라, 비워라, 모셔라, 함께 하라”는 말씀과 맥이 통한다는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원주 기독병원에 계실 때였습니다. 몰라보게 수척해지셨지만, 의연한 표정으로 “암도 하늘이 내린 벼슬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디 훌륭한 목사님 돼 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 나이가 올해 70이니 제가 선생님보다 더 오래 살았네요. 제가 퇴임을 18개월 남겨두고 있습니다만, 부끄럽게도 저는 선생님처럼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은 늘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살려고 애는 썼습니다. 무위당에 계신 분들이 오신다고 해서 며칠 전부터 아내와 설레며 지내다가 어제 밤에는 선생님 생각에 잠을 설쳤습니다. 제가 말씀을 충분히 잘 했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교회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대기업 삼성이 못한 일을 교회가 한 셈이군요. 매주 토요일에 급식을 하고 있는데 200명이 오셔서 식사를 하고 갑니다. 지금까지 10만 명 넘은 분에게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교회 앞 건물을 사서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있는데 이 건물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에서 ‘시은관(施恩館)’이라고 지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 기도 때 누가 뒤통수를 툭 때리면서 “야, 네가 베풀긴 뭘 베풀어. 찾아오시는 분들 잘 모셔야지.” 이러는 거예요. 순간 눈앞에 선생님 얼굴이 어른거렸어요. 그래서 베풀 시(施)를 모실 시(侍)자로 바꿨습니다. 지금도 ‘식사하러 오시는 저분들이 주인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재작년에는 교회에서 모은 헌금으로 북한의 평안북도에 있는 도시에다가 병원을 지어주었습니다. 북한에서 제일 급한 게 산부인과라고 하더라고요. 산모들이 아이를 낳으면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건강이 말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미국 LA에 있는 교회와 NGO의 도움을 얻어 산부인과와 치과가 있는 4층짜리 병원을 지었습니다. 요즘은 남북관계가 좋지 않아 가보지도 못하고 모니터링도 못하고 있어서 무척 안타깝습니다. 퇴임 하시고 난 뒤 계획을 말씀해주시죠? 선생님이 무위(無爲)를 강조하셨잖아요. 무엇을 억지로 하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라는 ‘처여한민(處與寒民)’으로 시작해서 맨 끝에는 명예와 이익이 있는 곳엔 가지 말라는 ‘부처명리(不處名利)’로 저를 꽉 붙들어 놓고 43년을 올바른 길로 안내해주셨습니다. 늘 걱정을 많이 해주셨고, 생명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선생님은 제게는 아버지, 사모님은 어머님 같은 분이셨습니다. 저는 가끔 무위당사람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요즘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살펴봅니다. 소식지도 계속 발간하고 있고, 누가 무위당학교에서 강연했는지도 알게 되고, 얼마 전에는 이현주 목사님과 이철수 화백이 강연했다는 소식도 알게 되었고···. 참 열심히들 선생님 기리는 일들을 하고 있구나 하면서 흐뭇해했습니다. 무위당에 계신 분들이 오신다고 해서 며칠 전부터 아내와 설레며 지내다가 어제 밤에는 선생님 생각에 잠을 설쳤습니다. 제가 말씀을 충분히 잘 했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교회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김찬수 무위당사람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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