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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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조회수 | 3,211 | |
김민기와 다시 돌아온 ‘지하철 1호선’ 12월 30일까지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지하철 1호선 지난달 매지리 토지문화관에서 1980년대 탄광촌 이야기를 노래극으로 그린 <아빠 얼굴 예쁘네요> 공연을 보았다. <아빠 얼굴 예쁘네요>는 김민기 작사·작곡·연출의 아동극으로 탄광촌 어린이들의 따뜻한 우정과 마을 사람들의 인간애가 진한 감동으로 전해지는 공연이었다. 관객은 대부분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온 어린학생들이었다. 도시에 사는 어린이들에게 낯선 탄광촌에 대한 호기심과 극의 중심인물로 나오는 비슷한 또래 아이들의 학교생활과 우정에 공감해선지 공연을 보는 아이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고 얼굴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는데 함께 간 지인이 소근 거렸다. “혹시 저분 김민기 선생님 아니에요?” 그가 눈짓을 보낸 곳을 바라보니 맨 뒤쪽 눈에 잘 띄지 않는 후미진 자리에 팔짱을 끼고 조용히 앉아 있는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김민기 선생이었다. 무위당 선생님이 살아계셨을 때 선생을 아버지처럼 따랐던 그와 기일 행사 때 묘소에서 인사를 몇 번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이 공연의 연출가이지만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를 알아본 이상 못 본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자 자신의 모습을 들킨 것에 다소 쑥스러워하며 “잘 봤냐?”고 말했다. 목소리에도 쑥스러움이 묻어났다. 몇 마디 말을 나누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얼마 전에 그가 어렵게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프로그램 진행자가 "왜 방송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냐?"고 묻자 김민기는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배우들을 앞 것들이라고 하고, 스태프들을 뒷 것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뒷 것의 대표를 맡고 있다 보니 앞에 나서는 것이 부끄럽다"고 답했다. 김민기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침이슬과 무위당 장일순
김민기 하면 누구든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가 작사·작곡한 ‘아침이슬’일 게다. ‘아침이슬’은 무위당 선생의 애창곡이었다.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술자리에서 흥이 오르면 무위당 선생은 ‘아침이슬’을 즐겨 부르곤 했는데, 이 소절을 부를 때면 늘 눈가에 촉촉하게 이슬이 맺혔다. ‘아침이슬’은 1971년에 도전적이며 패기에 넘치는 양희은의 보컬과 김민기의 기타 반주로 탄생한 대중가요였다.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는 “이 노래가 나온 순간이야 말로 한국 대중문화에 딱 한 번 존재하는 혁명의 순간”이라고 말했지만, 이 곡이 시장에 나왔을 땐 대중에게 생경한 음악 코트 때문이었는지 3천장밖에 팔리지 않은 실패한 음반이었다.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한 채 사라지는 듯이 보였던 ‘아침이슬’은 1년 뒤 유신반대 시위에 참가한 젊은이들에게 시대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급속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노래는 불려지는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것이며, 노래의 역사적 힘을 만드는 장본인은 대중’이라는 말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시위대를 선동하는 씩씩한 멜로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끓어오르는 분노로 부정을 규탄하는 가사도 없는 이 노래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가 70년대와 80년대 한국 청년의 송가가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아침이슬’은 창작자의 본의와 다르게 운동권의 시위가로 인식되면서 독재정권의 판금 목록에 올랐다가 1986년 6월항쟁이 끝난 뒤 복권되었다. 이후 ‘아침이슬’은 우리 사회의 주요 변곡점마다 선택되고 불려지는 ‘시민의 노래’가 되었다. 2016년에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세대의 차이를 넘어 다 함께 ‘아침이슬’을 부르며 가슴에 뜨겁게 관류하는 정신이 있음을 확인했다. 70년대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이 노래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김민기는 오래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1987년 6월에 나도 군중 속 에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든 노래를 부르는 걸 봤다. 노래를 듣는 내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절절하게 부르고 있었으니까…. 그때 느꼈다. 이건 내 노래가 아니라 저 사람들의 노래라고.” 김민기는 원주와도 인연이 깊다. 1970년대 초에 대학 선배인 김지하 시인의 소개로 무위당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 뒤로 자주 선생님 댁을 찾아 많은 가르침과 사랑을 받았다. 무위당은 김민기 노래의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노랫말과 우리 정서를 담은 선율을 좋아했다. 선생은 “그의 음악의 독창성이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있는 두 발에서 나오며 공동체의 어울림을 가능하게 해준다”며 매우 흐뭇해했다. 1973년 즈음 천주교 원주교구를 중심으로 가톨릭권의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때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가 전국 순회공연을 나섰는데, 초연을 원주 가톨릭센터에서 했다. ‘금관의 예수’에 나오는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김민기가 초연 공연 장소인 원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만든 곡이다. 그는 1979년에 농사를 짓겠다며 고향인 익산에 내려가 구도자처럼 땅을 갈고, 경기도 전곡에서 유기농사를 짓기도 했고, 1989년에 한살림 모임 초대 사무국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이는 땅을 소중히 여기고 농민을 사랑한 무위당 선생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위당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김민기는 “선생님은 내게 친아버지 같은 분이셨다”며 애통해했다. 학전 소극장과 <지하철 1호선>
19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던 김민기는 1991년에 학전 소극장 경영자이자 뮤지컬 연출자로 변신했다. 첫 작품이 1994년에 초연된 <지하철 1호선>이다. 독일 극작가 폴커 루드비히의 원작으로 1986년에 베를린의 그립스 극단이 공연한 작품이다. 동독의 섬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서베를린 자유에 대한 꿈을 담은 내용인데, 김민기는 원작을 한국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해 연변처녀 ‘선녀’가 서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1998년 IMF 시절 힘겨웠던 한국사회의 모습을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냈다. <지하철 1호선>의 첫 공연을 본 어느 평론가는 “원작의 고향인 베를린의 자유를 향한 꿈을 김민기가 통일을 향한 서울의 꿈으로 여과해 인류 보편의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로 바꾸는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평하면서 “남한의 뮤지컬이 북한에 간다면 1호는 <지하철 1호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하철1호선>은 1994년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수개월간 공연되면서 2000년 2월 6일에 1,000회 공연을 맞았다. 1,000회 공연은 원작인 독일 그립스 극단도 이루지 못한 성과였다. 원작자 폴커 루드비히는 한국에 와서 1,000회 기념공연을 보고 2000년 1월 1일 이후 저작권료 전액을 면제했다. 루드비하는 이 작품이 더 이상 저작권료를 낼 필요가 없는 김민기의 창작 작품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후 <지하철 1호선>은 독일, 일본, 중국 등 연이은 해외공연을 통해 극찬을 받았고, 2003년에 2,000회, 2008년에 4,000회 공연까지 15년간 무려 70만 명이 관람한, 대학로 소극장의 신화를 써 내려간 작품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김민기는 4,000회를 끝으로 돌연 <지하철 1호선>의 막을 내렸다. 공연이 계속 잘 되고 있었지만 그에겐 아동 청소년 극을 무대에 올리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10여 년 동안 어린이들의 맑은 동심과 고민, 꿈, 소망을 다양한 색깔로 형상화한 아동극 창작에 매진해왔다. 다시 돌아온 <지하철 1호선>
지난 9월 8일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다시 돌아왔다. 올 12월까지 100회 한정 공연으로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다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지하철 1호선>을 다시 무대에 올리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주변에서 2018년에 맞게 내용을 수정해 공연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김민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작품은 1990년대 한국 서울의 풍속화이므로 주인공 캐릭터에 한계가 있다. 이를 2018년의 이야기로 수정 한다면 그것은 부분 개작이 아니라 새로 작품을 써야 한다. 1990년대라는 시간이 한국 사회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므로 그 자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하철 1호선>을 현실에 맞게 고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0년 만에 옛 모습으로 돌아온 <지하철 1호선>은 2018년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10년이 지났어도 서민들의 고달픈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그 시절의 감성이 여전히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돌아온 ‘지하철 1호선’ 공연 첫날 관객에게 인사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김민기는 이렇게 말했다. “어쩌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했더라도 그것 때문에 남들한테 함부로 무시당하거나 홀대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연극의 진짜 주인공입니다.” 1971년 ‘아침이슬’부터 2018년 ‘지하철 1호선’까지···, 김민기의 작품은 시대와 세대를 넘어 연대의 그물망 속에 있는 공동체의 가치를 환기시키며 우리를 각성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의 예술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0월 24일에 정부는 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지금까지 대중예술에 기여해온 공로를 생각하면 이보다 더 큰 상을 줘도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워낙 겸손한데다 남 앞에 나서기를 부끄러워하는 그는 상을 받으면서 무척 쑥스러워했을 게다. 40년이 넘도록 우리 사회의 문화적 토양을 일구는 일을 묵묵히 실천해온 그는 종종 서울을 떠나 수도승처럼 원주토지문학관에 파묻혀 새로운 창조성을 모색하며 한국 예술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지금까지 김민기가 창조해 냈고 앞으로도 창조해 낼 예술은 우리 정신사에 뚜렷이 조명돼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글 김찬수 무위당사람들 기획관리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