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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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조회수 | 3,621 | |
하나의 풀도 가벼이 여기지 마라 과감한 생략과 강조로 바람에 흩날리는 난초 잎과 꽃대를 표현한 ‘무명유한’은 역시 바람에 흐르는 듯 써내려간 화제 글씨와 어우러져 실제로 어느 바람 부는 초 여름날 여유롭게 거리를 거닐며 유유자적하는 거사의 한가로움이 느껴진다. 특히 이 작품에서 화제와 낙관은 마치 또 하나의 난초 이파리인 듯 회화성이 두드러지게 써(그려)졌다. 온갖 공명과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고향에 은둔자적하며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었던’ 선생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다. ‘몰라몰라 정말 모른대니깐’은 1984년 봄에 그린 작품이다. 역시 과감하게 생략된 이파리와 강조된 꽃 모양이 수줍은 여인이 살포시 고개 숙인 얼굴인 듯하다. 위로 올려 친 이파리의 선이 매우 유려하다. 선생의 작품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회화성과 조형미가 느껴지는 작품 중의 하나다. ‘나 세상에서 깨진 놈들 속에 있노라’는 아예 대 놓고 사람의 얼굴로 그려졌다. 두 개의 난초 잎과 과장된 꽃잎이 고뇌 가득한 표정으로 느껴진다. 선생의 의인란 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한 작품인데, 그 사연이 더 감동적이다.
선생께서 5·16쿠테타 직후 사상범으로 끌려 가 옥살이를 하실 때 그 안에서 경험했던 것을 표현한 그림인데 특유의 익살과 해학이 넘친다. 그 시절 교도소 물자 사정이야 어떠했으랴! 성경책의 보들보들 얇은 종이가 볼 일 보고 뒤처리하기에는 최고였을 터이니, ‘역시 예수님이 사람 살리더라’는 유머가 자칫 고지식한 신자들에게 불경죄로 읽혀질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성경책 종이를 찢어 뒤를 닦는 이의 흐뭇함인지, 아니면 그 모습을 옆에서 쳐다보면서 궁즉통(窮則通), 궁하면 통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재미있어 하는 것인지, 어쨌든 화제와 딱 맞아 떨어지는 난초 얼굴 표정 하난 정말 일품이다. 선생의 서예 작품은 글씨도 그림처럼 회화적 조형미가 넘친다. 서화 그림에 붙이는 화제뿐만 아니라, 서예 작품의 글씨 자체도 마치 하나의 그림인 듯하다. ‘무심(無心)’과 ‘무(無)’ 두 작품도 그러하다. 글씨를 걸어놓은 듯 그림을 걸어놓은 듯 경계가 오묘하다. 단 ‘무심’이 정적이고 평안한 느낌이라면, ‘무’는 역설적이게도 역동이 넘치는 느낌을 준다. ‘무’에서 느껴지는 저 생동감은 도대체 무엇인가! 같은 글자가 들어가 있음에도 느낌과 역동이 뚜렷이 대비되는 것이 이 두 작품이다. 이정동 도의원이 소장하고 있는 ‘천심락’은 선생의 서예 글씨 중에서도 회화성이 유난히 두드러진 작품이다. 특히 ‘락(樂)’자는 정말 즐거워서 겅중겅중 두 팔을 들고 뛰어 노는 사람들 모습이다. 보고 있으면 덩달아 저절로 즐거워지는 느낌이다. 선생은 원주에 사는 사람들이 원주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어머니처럼 자애롭게, 온 세상을 골고루 비추는 달처럼 차별 없이 대하고 맞이해야 한다는 뜻에서 치악산을 ‘모월산’으로 바꿔 불렀다. 실제로 그 어렵고 험난했던 시절 선생을 찾아오는 많은 이들을 선생은 차별 없이 자애롭게 맞이하고 대접했다. 지금도 원주는 비슷한 규모의 다른 도시에 비해서 텃세가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타지에서 들어 온 사람들이 정착하고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전국에서 최고라 한다.
‘만물일화(萬物一華)’는 선생의 생명에 대한 관점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것은 우주의 모든 존재가 소중한 것이어서 피아와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자연과 인간을 가르고 경쟁과 분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대인들의 척박한 삶에 대한 경종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각부물(物各付物)’이라고 할 수 있다. 만물은 각자 그 나름대로 물성을 지니고 있으니, 내가 가진 편견과 아집으로 대하지 말고 그 물성 그대로 대하라. 자연에는 우열과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 선생은 또 ‘勿輕一草 自有天理 况且人乎’라 하셨다. 하나의 풀도 가벼이 여기지 마라 스스로 하늘 이치가 있다.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야 어떠리오. 봉산동 원주천 둑방길을 거닐며 선생은 늘 이름 없는 풀들과 대화했다. 한 밤 풀 섶에서 들려오는 벌레 소리에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인 것을,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살아있지 않은 것들을 벗 삼고 스승으로 여겼다. ‘밥 한 그릇 속에 우주가 있다’는 해월의 말씀은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졌다. 무위당 선생께서 즐겨 쓰셨던 이 작품을 운곡학회 양근열 선생이 영인본으로 제작하여 원주 시내 각 학교에 무료로 보급하여 급식실에 걸어 놓았다. ‘온 우주가 참여해서 지은’ 한 끼 밥을 먹는 학생들이 그 귀한 뜻을 새기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라면서 한 일이다. 이 자리를 빌려 양근열 선생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얼마 전에 원주 한살림의 태동지인 개운동 매장이 혁신 도시로 이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어찌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새로운 둥지에서 멋진 모습으로 개장한 늘품 매장의 간판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꽤 여러 해 전, 한살림 본부에서 일괄적으로 전국 매장의 간판 글씨를 교체한 적이 있다. 이 때 원주한살림 실무를 맡고 있던 안진구씨는 원래 간판 글씨야말로 한살림의 정신을 제대로 담고 있다고 판단하여 전국 본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에 신규 개장하던 단계 매장의 간판을 예전 글씨체로 만들어 달았다. 그 글씨는 바로 무위당 선생이 1987년 가을에 쓴 글씨다. 삐뚤삐뚤 울퉁불퉁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라서 일명 ‘지렁이체’다. 지렁이가 무엇인가? 땅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생명체다. 농약치고 화학비료 범벅인 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생물이다. 땅 속의 유기물을 분해하고 숨구멍을 내어 땅을 기름지게 해 주는 유익한 존재다. 한살림의 시작은 자본과 인간의 탐욕으로 망가져가는 땅과 물과 공기를 살려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자연과 인간의 상생, 생산자와 소비자의 협동으로 환경과 생태계를 온전히 보전하겠다는 정신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한살림 운동이다. 그러므로 땅을 살리는 지렁이야말로 한살림 정신의 핵심 키워드인 것이다. 그리고 무위당 선생이 지렁이체로 쓴 ‘한살림’ 글씨는 그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취지가 잊혀지고 인쇄체 글씨로 제작된 새 간판이 옛 간판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그 정신이 담긴 간판을 지켜내고자 했던 원주 사람들의 고집마저 세월의 변화 속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더 늦기 전에 되돌려야 한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최소한 우리가 지켜내고 보전해야 할 가치를 지키는 일이다. 비용이 좀 들더라도 하루 빨리 바로잡기를 바란다. 1992년 어느 날 나는 당시 밝음신협 앞에 있던 동주서실에 가 있었다. 불쑥 무위당 선생께서 들어오셨고, 동주 선생은 가장 좋은 먹을 갈았다. 당시 병중이던 선생께서는 그 해 지인들에게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불편한 몸 상태이셨지만 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그래서 서화자료집에도 1992년 작품들이 꽤 많이 수록되었다. 어쨌든 선생께서는 붓을 꽉 쥐고 여기저기 전해 줄 작품 몇 점을 쓰거나 그리셨고 나는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다 끝난 듯싶더니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써서 내게 주셨다. 의도하지 않았던 횡재(?)에 기뻤지만, 단순한 이 네 글자의 의미를 좀처럼 해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쭈었더니 선생께서 말씀해 주셨다.
‘너 자신이 있다고 보지 말아라’ 거장의 작품은 습작도 훌륭하다. 가끔 쓰다가 버린 작품으로 장난질을 하는 사람들이 문제이긴 하지만, 무위당 선생의 민들레 작품은 비록 습작임에도 어느 작품 못지않은 걸작이다. 민들레 홀씨 하나하나가 참 소중한 생명이다. 선생께서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 협동과 상생으로 만드는 공동선의 가치와 한살림 정신을 저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팔방 전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무위당의 생명 사상을 가장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