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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ORY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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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풀도 가벼이 여기지 마라


들어가며

무위당 서화에 나타나는 생명 사상에 대해서는 이미 유홍준(전 문화재청장), 이철수(판화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선생 등 쟁쟁한 선배들께서 다룬 적이 있고, 그 외에도 이동국(예술의 전당 서예부장), 채희승(호산서예연구소) 등 수많은 전문가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위당의 예술 세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공부할 거리, 이야기할 거리가 산더미 같은 현실이다. 많은 이들이 덤벼들었다가 그 사상과 예술의 깊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돌아 나오기 일쑤다. 그런데 오랫동안 지필묵과 멀어져 있었던 내가 새삼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괜히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 될까 지레 겁이 났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아! 좀 더 쉽게, 무겁지 않게 한 번 다뤄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원고 마감 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 노트북 앞에 앉아 평소 마음속에 느꼈던 것들을 편안하게 꺼내 보려고 한다. 일단 먼저 지금 이 자리에서 펼치는 내용은 ‘비전문가’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주위 사람들과 함께 나누거나 고민해 보고 싶었던 것들이라는 말씀을 드린다.

생명 사상을 누가 먼저 말했느냐, 어떤 이들은 저마다 ‘내가 먼저’라고 내세우며 다투기도 한다. 참 가소로운 일이다. ‘누가 먼저’가 그리 중요한 것인가? 무위당 선생이 아시면 무척이나 어처구니없어 하실 것이다. 선생은 생명 사상을 거대 담론으로 거창하게 혹은 관념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고통 받는 민중과 인간의 탐욕으로 망가져가는 자연을 안쓰러워하면서 그들의 해방과 상생을 도모하는 마음을 비유와 은유로 서화에 담았다. 글씨의 내용이나 그림의 화제(畵題)는 유·불·도(儒彿道)를 넘어 동학(東學)을 아우르고 성서(聖書)에 이르는 등 동·서양과 시·공을 넘나드는 폭넓은 사유의 세계에서 촌철살인을 끄집어내고 있지만, 어려운 말보다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듯 화두를 주신다. 그림은 마치 사람인 듯 온갖 표정과 감정을 담아내는 의인란(擬人蘭)으로부터 단단한 필력이 느껴지는 대나무까지, 전통 서법에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 속에 선생 특유의 해학과 미학을 담아내고 있다. 가만히 보면 선생의 서화에서는 글씨가 그림이고 그림이 글씨다. 둘의 경계가 무의미하다. 어떤 이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소박해 보이지만 그 깊이가 대단하다는 뜻이다. 근래에 선생의 서화를 대놓고 흉내 내는 이들도 등장했다. 스스로 작가라 칭하지만 아무리 똑같이 모방해도 전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고한 인품과 지성, 그리고 내공이 바탕이 되어야 나올 수 있는 작품이기에 그렇다.
특히 선생의 서화 작품 중엔 독특한 디자인 감각이 돋보이는 것들이 많다. 그 조형미는 21세기 현대 사조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그래서 무위당 기념관에서 기념품을 제작할 때나, 책이나 도록을 만들 때 작품들이 지닌 현대적 감각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오늘은 무위당 작품의 조형미와 디자인적 요소를 화제(畵題)의 뜻과 함께 살펴본다. 알아듣기 어려운 관념적인 표현이 아니라, 일상에서 늘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며 살아가라는 화두로 전해 주셨던 무위당 선생의 그 말씀들을···.

빼어난 조형미와 뛰어난 디자인 감각

선생의 서화는 전통적인 필묵의 표현 기법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운 작품들이 많다. 사람의 표정을 담아낸 듯 의인화된 난초 그림을 포함하여 사군자뿐만 아니라 작품 속 화제 글씨 또한 그 표현이 분방하면서도 조형미가 강하여 마치 현대 미술의 디자인이나 일러스트 작품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무명유한’이나 ‘몰라몰라 정말 모른대니깐’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과감한 생략과 강조로 바람에 흩날리는 난초 잎과 꽃대를 표현한 ‘무명유한’은 역시 바람에 흐르는 듯 써내려간 화제 글씨와 어우러져 실제로 어느 바람 부는 초 여름날 여유롭게 거리를 거닐며 유유자적하는 거사의 한가로움이 느껴진다. 특히 이 작품에서 화제와 낙관은 마치 또 하나의 난초 이파리인 듯 회화성이 두드러지게 써(그려)졌다. 온갖 공명과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고향에 은둔자적하며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었던’ 선생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다. 


‘몰라몰라 정말 모른대니깐’은 1984년 봄에 그린 작품이다. 역시 과감하게 생략된 이파리와 강조된 꽃 모양이 수줍은 여인이 살포시 고개 숙인 얼굴인 듯하다. 위로 올려 친 이파리의 선이 매우 유려하다. 선생의 작품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회화성과 조형미가 느껴지는 작품 중의 하나다. 

 ‘나 세상에서 깨진 놈들 속에 있노라’는 아예 대 놓고 사람의 얼굴로 그려졌다. 두 개의 난초 잎과 과장된 꽃잎이 고뇌 가득한 표정으로 느껴진다. 선생의 의인란 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한 작품인데, 그 사연이 더 감동적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아버지 박정기씨와 1970년 제 몸에 불을 붙여 한국 노동인권운동의 효시가 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실 마련에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려고 서화전을 열기로 한다. 이들은 1988년 여름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모으는데 그게 마음처럼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나보다. 냉소와 외면에 상처받는 일도 부지기수였다는데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원주 무위당 선생을 찾아왔다. 전후 사정을 듣고 난 선생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섯 점의 작품을 써 주셨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 중의 하나이다. 저 얼굴은 누구의 얼굴일까? 종철이의 얼굴일까, 태일이의 얼굴일까, 아니면 부패하고 무도한 권력에 맞서다가 희생된 자식을 둔 부모의 고통스런 얼굴일까! 선생은 누구의 얼굴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일까? 이 작품을 치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던 이들은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다는데, 갑자기 문득 궁금해진다.

이 외에도 선생의 난초 그림들은 인간의 희로애락은 물론이고 작품을 받는 그 많은 이들의 성정과 개성에 딱딱 맞아 떨어지게 그려 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 표현의 다양성과 자유로움이 놀라울 뿐이다. 아래 두 작품 역시 그렇게 그려 낸 그림들인데, 왼쪽 작품은 거침없이 표현된 사람 눈망울 때문에, 오른쪽 작품은 보기 드믄 산 속 야생화 그림이라서 골라 보았다. 

 

 

 선생께서 5·16쿠테타 직후 사상범으로 끌려 가 옥살이를 하실 때 그 안에서 경험했던 것을 표현한 그림인데 특유의 익살과 해학이 넘친다. 그 시절 교도소 물자 사정이야 어떠했으랴! 성경책의 보들보들 얇은 종이가 볼 일 보고 뒤처리하기에는 최고였을 터이니, ‘역시 예수님이 사람 살리더라’는 유머가 자칫 고지식한 신자들에게 불경죄로 읽혀질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성경책 종이를 찢어 뒤를 닦는 이의 흐뭇함인지, 아니면 그 모습을 옆에서 쳐다보면서 궁즉통(窮則通), 궁하면 통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재미있어 하는 것인지, 어쨌든 화제와 딱 맞아 떨어지는 난초 얼굴 표정 하난 정말 일품이다. 

 선생의 서예 작품은 글씨도 그림처럼 회화적 조형미가 넘친다. 서화 그림에 붙이는 화제뿐만 아니라, 서예 작품의 글씨 자체도 마치 하나의 그림인 듯하다. ‘무심(無心)’과 ‘무(無)’ 두 작품도 그러하다. 글씨를 걸어놓은 듯 그림을 걸어놓은 듯 경계가 오묘하다. 단 ‘무심’이 정적이고 평안한 느낌이라면, ‘무’는 역설적이게도 역동이 넘치는 느낌을 준다. ‘무’에서 느껴지는 저 생동감은 도대체 무엇인가! 같은 글자가 들어가 있음에도 느낌과 역동이 뚜렷이 대비되는 것이 이 두 작품이다.
‘무심’이 휴식과 마음의 평정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어울린다면, ‘무’는 열정을 활활 불태우며 무언가 어떤 일을 도모하는 이가 늘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에너지를 충전할 작품이다. 

 이정동 도의원이 소장하고 있는 ‘천심락’은 선생의 서예 글씨 중에서도 회화성이 유난히 두드러진 작품이다. 특히 ‘락(樂)’자는 정말 즐거워서 겅중겅중 두 팔을 들고 뛰어 노는 사람들 모습이다. 보고 있으면 덩달아 저절로 즐거워지는 느낌이다. 

 선생은 원주에 사는 사람들이 원주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어머니처럼 자애롭게, 온 세상을 골고루 비추는 달처럼 차별 없이 대하고 맞이해야 한다는 뜻에서 치악산을 ‘모월산’으로 바꿔 불렀다. 실제로 그 어렵고 험난했던 시절 선생을 찾아오는 많은 이들을 선생은 차별 없이 자애롭게 맞이하고 대접했다. 지금도 원주는 비슷한 규모의 다른 도시에 비해서 텃세가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타지에서 들어 온 사람들이 정착하고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전국에서 최고라 한다. 

 

‘만물일화(萬物一華)’는 선생의 생명에 대한 관점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것은 우주의 모든 존재가 소중한 것이어서 피아와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자연과 인간을 가르고 경쟁과 분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대인들의 척박한 삶에 대한 경종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각부물(物各付物)’이라고 할 수 있다. 만물은 각자 그 나름대로 물성을 지니고 있으니, 내가 가진 편견과 아집으로 대하지 말고 그 물성 그대로 대하라. 자연에는 우열과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 

 선생은 또 ‘勿輕一草 自有天理 况且人乎’라 하셨다. 하나의 풀도 가벼이 여기지 마라 스스로 하늘 이치가 있다.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야 어떠리오. 봉산동 원주천 둑방길을 거닐며 선생은 늘 이름 없는 풀들과 대화했다. 한 밤 풀 섶에서 들려오는 벌레 소리에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인 것을,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살아있지 않은 것들을 벗 삼고 스승으로 여겼다. 

 ‘밥 한 그릇 속에 우주가 있다’는 해월의 말씀은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졌다. 무위당 선생께서 즐겨 쓰셨던 이 작품을 운곡학회 양근열 선생이 영인본으로 제작하여 원주 시내 각 학교에 무료로 보급하여 급식실에 걸어 놓았다. ‘온 우주가 참여해서 지은’ 한 끼 밥을 먹는 학생들이 그 귀한 뜻을 새기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라면서 한 일이다. 이 자리를 빌려 양근열 선생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얼마 전에 원주 한살림의 태동지인 개운동 매장이 혁신 도시로 이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어찌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새로운 둥지에서 멋진 모습으로 개장한 늘품 매장의 간판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꽤 여러 해 전, 한살림 본부에서 일괄적으로 전국 매장의 간판 글씨를 교체한 적이 있다. 이 때 원주한살림 실무를 맡고 있던 안진구씨는 원래 간판 글씨야말로 한살림의 정신을 제대로 담고 있다고 판단하여 전국 본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에 신규 개장하던 단계 매장의 간판을 예전 글씨체로 만들어 달았다. 그 글씨는 바로 무위당 선생이 1987년 가을에 쓴 글씨다. 삐뚤삐뚤 울퉁불퉁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라서 일명 ‘지렁이체’다. 지렁이가 무엇인가? 땅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생명체다. 농약치고 화학비료 범벅인 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생물이다. 땅 속의 유기물을 분해하고 숨구멍을 내어 땅을 기름지게 해 주는 유익한 존재다. 한살림의 시작은 자본과 인간의 탐욕으로 망가져가는 땅과 물과 공기를 살려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자연과 인간의 상생, 생산자와 소비자의 협동으로 환경과 생태계를 온전히 보전하겠다는 정신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한살림 운동이다. 그러므로 땅을 살리는 지렁이야말로 한살림 정신의 핵심 키워드인 것이다. 그리고 무위당 선생이 지렁이체로 쓴 ‘한살림’ 글씨는 그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취지가 잊혀지고 인쇄체 글씨로 제작된 새 간판이 옛 간판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그 정신이 담긴 간판을 지켜내고자 했던 원주 사람들의 고집마저 세월의 변화 속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더 늦기 전에 되돌려야 한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최소한 우리가 지켜내고 보전해야 할 가치를 지키는 일이다. 비용이 좀 들더라도 하루 빨리 바로잡기를 바란다.

마무리하며

지극히 주관적인 비전문가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횡설수설 늘어놓고 보니 무위당 선생께 불경의 죄를 진 것 같아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무위당 선생의 생명사상은 거창한 거대 담론이나 관념론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삶의 지침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위당의 서화 작품 하나하나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때로는 준엄하게 때로는 익살맞게 비유와 상징, 그리고 촌철살인의 경구와도 같은 화두를 작품에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네 주셨다. 선생의 작품을 소장하고 계신 분들은 누구나 그 화두를 가슴에 담고 살아오면서 이런 자리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을 것이라고 본다. 다음엔 더 많은 분들이 ‘내 삶 속의 무위당 사상’을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임신년(1992년), 병중이던 선생께서 써 주신 작품 속 화두를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살아가는 두 사람의 사연을 소개하며 마친다.

김남규씨는 원주시 공무원이었다. 봉산동 사무소에 근무할 때 우연히 만난 선생께서 1992년에 ‘시민여상(視民如傷)’, 네 글자를 써 주셨다. ‘백성을 다친 사람 보듯 하라’ 혹은 ‘백성을 상처를 대하듯이 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백성을 소중히 대해야 한다는 관료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맹자 말씀이다. 이후에 그는 이 네 글자를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며 공무원 생활을 마쳤다. 뿐만 아니라 퇴직 후에는 공공기관에서 민원인들의 서류 작성과 준비를 돕는 일을 하는 봉사활동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 

 1992년 어느 날 나는 당시 밝음신협 앞에 있던 동주서실에 가 있었다. 불쑥 무위당 선생께서 들어오셨고, 동주 선생은 가장 좋은 먹을 갈았다. 당시 병중이던 선생께서는 그 해 지인들에게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불편한 몸 상태이셨지만 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그래서 서화자료집에도 1992년 작품들이 꽤 많이 수록되었다. 어쨌든 선생께서는 붓을 꽉 쥐고 여기저기 전해 줄 작품 몇 점을 쓰거나 그리셨고 나는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다 끝난 듯싶더니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써서 내게 주셨다. 의도하지 않았던 횡재(?)에 기뻤지만, 단순한 이 네 글자의 의미를 좀처럼 해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쭈었더니 선생께서 말씀해 주셨다. 

 

‘너 자신이 있다고 보지 말아라’
당시 사립학교 법인의 무도한 횡포와 싸우느라고 심신이 지쳐 있던 내게 선생께서 주신 위로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나만 옳다는 교만에 빠지기 쉬운 내 성정을 읽으신 선생께서 내게 주신 경구였다. 여전히 그 말씀을 지키며 살기는 어렵지만, 가훈으로 삼아 늘 들여다보며 스스로 경계한다. 내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아마도 그 해 선생께서 쓰신 작품 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이 아닌가 싶다!
당시 사립학교 법인의 무도한 횡포와 싸우느라고 심신이 지쳐 있던 내게 선생께서 주신 위로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나만 옳다는 교만에 빠지기 쉬운 내 성정을 읽으신 선생께서 내게 주신 경구였다. 여전히 그 말씀을 지키며 살기는 어렵지만, 가훈으로 삼아 늘 들여다보며 스스로 경계한다. 내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아마도 그 해 선생께서 쓰신 작품 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이 아닌가 싶다!​ 

 거장의 작품은 습작도 훌륭하다. 가끔 쓰다가 버린 작품으로 장난질을 하는 사람들이 문제이긴 하지만, 무위당 선생의 민들레 작품은 비록 습작임에도 어느 작품 못지않은 걸작이다. 민들레 홀씨 하나하나가 참 소중한 생명이다. 선생께서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 협동과 상생으로 만드는 공동선의 가치와 한살림 정신을 저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팔방 전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무위당의 생명 사상을 가장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글은 2017 무위당 23주기 추모행사 - 무위당 미학포럼 발표글이며 무위당사람들 63호에 실려있습니다.>

​ 글 김익록 강원도교육청 장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