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2-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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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조회수 | 702 | |
불편한 적 없던 사람 꽤나 창피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오래 전의 일이다. 어느 대형서점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저만 치 누군가 양쪽에 목발을 짚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출입문이 너무 육중하게 느껴졌다. 내게도 이렇게 무거운데, 거동이 불편하다면 더 그렇겠지 싶어 잠시 문을 열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문을 연 채 기다리는 나를 보더니, 멀찍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딴에는 배려였던 행동이 갑자기 재촉이 되어버린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허둥지둥하던 나는 급기야 문을 얼른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내가 놓아버린 묵직한 문 밖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멈춰선 그 분의 얼굴 이 아직까지 아프게 떠오른다. 몇 년이 흘러 공교롭게도 심한 발목골절로 잠시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됐다. 걸을 수 없게 되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별 생각 없이 오르내렸던 계단이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암벽이 되었고 경사로 없는 건물은 무언의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다. 집 밖에 나서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 워 누가 굳이 묻지 않아도 필사적으로 설명하곤 했다. “발목이 부러져서요..!” 휠체어를 졸업하고 목발까지 서너 달, 계획에 없던 모종의 체험을 하고 나서야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살았는지 깨달았 다. ‘국민 대다수’라는 폭력은 왜 누군가의 고단한 삶을 고려하지 않는 것일까. ‘장애인이 편하면 모두가 편합니다’라는 구호를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표현이 썩 적절하지는 않 겠지만 이보다 더 쉽게 비장애인 위주 사회의 부조리를 설명하는 말은 없다고 본다. 모두가 편할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는데 굳이 경계를 만들어 불편을 감수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불편을 직접 겪어본 적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진작 목발생활이 그토록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누군 가에게 어줍잖게 문을 열어주려다 도리어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조금 더 용기를 내 모든 사람이 편히 다닐 수 있도록 자동문을 설치해달라고 서점에 건의했을 지도 모른다. 불편이라는 짧은 단어로 갈음되는 모든 생존의 위기에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함께 투쟁하기를 두 려워하는 이유 역시 간단하다. 그 때 단지 운이 좋지 않았을 뿐, 앞으로는 그런 ‘불편’을 겪지 않을 거라는 막연하고도 이기적인 예측 때문이다. 나는 종종 폭력적이다. 작정하고 폭력을 휘두른 적은 결단코 없지만, 무의식중에 그렇게 된다. 내 안의 폭력성을 인지할 때마다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투쟁하는 이에게 공감하면서도 뜻을 함께 하 지 않는 건 방관이다. 방관 또한 폭력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혐오발언을 방관하며 오늘 도 번뇌에 빠진다. 세상은 왜 이 모양인가. 나는 또 왜 이 모양인가. 글 황진영 지역문화콘텐츠협동조합 스토리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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