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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 이야기 - 기어라, 모셔라, 함께하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8-17
첨부파일 조회수 5,352

기어라, 모셔라, 함께하라,

원주시 중앙로 83번지 문화의 거리에는 6층짜리 밝음신협 건물이 우뚝 서 있습니다. 밝음신협 4층에는 협동조합운동의 선구자이자 서예가였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협동운동의 자취가 남아 있는 무위당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어 선생의 삶과 정신에 대해 소개하고 생명운동과 지역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5평 정도의 작은 기념관이지만 무위당 선생이 썼던 모자와 지팡이를 비롯한 유품과 서예 작품, 책 그리고 안내 설명이 잘 갖추어져 있어 선생을 이해하는 데 도움 이 되고 있습니다.


기념관에는 무위당만인회와 ()무위당사람들의 사무실이 함께 있어, 무위당 선생의 협동과 자치, 생명과 평화의 정신을 배우고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매년 선생의 기일에 맞춰 추모행사를 열고, 2001년부터 계절에 한 번씩 소식지를 펴내며, 2012년부터 봄과 가을에 무위당 학교를 열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생명사상과 협동운동을 찾아 원주를 찾고 있습니다. 생명사상에 바탕을 둔 협동조합운동은 유기농산물 직거래와 환경 운동 그리고 생활협동조합 운동의 대표적인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지난 9월 말부터 무위당학교가 열렸고 전국으로 무위당학교가 확산되고 있는 등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가 다진 밑거름은 여전히 원주에 든든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뜻을 모아 건강한 협동 조합을 이루고, 여러 협동조합들이 또 서로의 힘을 합치고 있지요. 이렇게 지금까지 만들어진 협동조합은 원주 지역의 든든한 경제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만민이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 지기를 소망했던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 淳) 선생은 원주출신의 사상가로, 교육자·사회운동가·예술가 등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무수히 많습니다.


1950년대에는 민족통일운동을 주장한 혁신적 정치가이자 대성학교를 설립한 교육자로, 1960~70년대에는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말년에 는 유기농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하고 생명운동의 주춧돌을 놓은 생명사상가로서의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는 자신 스스로 좁쌀 한 알(一粟子)’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손수 지은 봉산동 집에서 먹과 벼루와 화선지를 벗 삼아 난초를 치고 붓글씨를 쓰며 올곧은 선비로 고결한 생을 사셨습니다. 무위당 선생은 원주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이 시대의 큰 스승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무위당의 생애


  장일순 선생은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호는 청강(靑江), 무위당(无爲堂), 일속자(一粟子) 등을 쓰셨습니다. 1940년 원주국민학교를 마친 다음 배재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1944년 서울공대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해방 후 미군 대령의 총장취임에 대한 반대운동에 참여해 제적되었습니다. 1946년에는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다 19506.25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내려오게 됩니다.

 195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서 설립한 대성학교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5년간 대성학원의 이사장을 역임하게 됩니다. 이후 원주를 떠나지 않은 채 교육운동과 정치운동을 벌입니다. 19604.19혁명 직후 그는 사회대중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5·16군사정변 직후에는 중립화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돼 3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정치 정화법 활동과 사회안전법에 묶여 모든 활동이 통제되었고, 정부는 집 앞 골목길에 파출소를 세워 놓고 철저한 감시를 하게 됩니다. 이후 칩거생활을 하며 포도농사를 짓는 한편 붓글씨와 서화를 통해 평온한 마음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그는 협동조합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지학순 주교 등과 민주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77년에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결심하고 그 연장선에서 1983년 도농(都農)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합니다. 생명사상을 탐구하고 생명운동을 활발히 벌이다가 위암발병으로 인해 1994년 봉산동 자택에서 67세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무위당의 발자취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낸 장일순 선생은 나이 서른 일곱인 1965년 원주교구의 설정과 함께 주교로 부임한 지학순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원주는 지역자치운동의 첫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두 분은 처음 만나서 지학순주교의 사목방침에 따라 본당의 재정 자립과 평신도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하여 본당별로 자치위원회를 조직하고, 1966년 원동성당에서 처음으로 신자들 35명과 출자금 64,190원으로 원주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70년대 민주화운동과 자립적인 생명공동체운동을 평생 함께하게 됩니다. 1969년에는 진광학원이 설립되면서 학생들의 협동 교육과 강원지역 사회개발을 위한 신협운동의 보급과 조직육성에 설립목적을 둔 협동조합 연구소가 설립됩니다. 이렇게하여 원주는 협동조합운동이 본격적인 기틀을 갖추게 됩니다.

  1972년은 원주지역 협동조합운동에 중요한 전기가 마련된 시점이었습니다. 하나는 신용협동조합법이 제정되어 합법적인 승인을 받았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남한강유역에 집중폭우로 수재민 145,000명이 발생하는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여 지역사회운동 차원의 대응이 요구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 지학순 주교는 서독으로부터 291만 마르크(36천만 원)의 재원을 마련하여 장일순 선생과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구성하여 마을단위의 공동체 운동과 자립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합니다. 이 사업을 위해 김영주, 김지하, 이우재, 김병태, 정인재, 박재일 이경국, 박양혁, 홍고광, 장상순 등 수십 명의 젊은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이 원주로 내려와 결합하게 됩니다. 이때 만들어진 농촌과 광산의 신협만 46개에 이르렀습니다. 원주캠프로 불리는 이들은 70년대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의 구속사건으로 뜨거워진 원주민주화운동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되며, 한국의 신협운동과 협동운동의 초석을 만드는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 뒤에 늘 장일순 선생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모든 일을 하시면서도 앞에 나서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장일순 선생은 협동운동이 단순히 생활운동 차원을 넘어선 생명사상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1989년 한살림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너 와 내가 하나되는 운동, 자연과 내가 하나인 것을 깨닫는 운동, 결과적으로 한 그릇의 밥 속에 온 우주가 있다는 해월선생의 생명사상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위당의 정신

우리는 연대 관계 속에, 유기적인 관계 속에, 헤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투쟁의 논리가 아니라 화합의 논리, 서로 협동하는 윤리 위에 있을 때 비로소 공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선생의 생명사상은
기어라, 모셔라, 함께하라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신 개문유하(開門流下)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문을 열고 민중의 삶으로 들어가 민중과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선생은 늘 머리 숙여 겸손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변방에 있는 민중 속에서 지역운동, 협동운동을 지속적으로 잘 유지하려면 주도하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겸손해야한다고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협동운동은 사람과 사람이 함께하는 경제적 결사체이기 때문에 늘 인간적 갈등과 경제적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이때 무위당 선생의 말씀대로 밑으로 기어서 일하지 않으면 수많은 갈등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선생은 해월선생의 모심의 사상을 잊지 않기를 당부하셨지요. 해월의 경인(敬人), 경천(敬天), 경물(敬物)사 상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이 온 우주의 선물인 것을 깨달아 잘 모셔야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나락도 연약한 한포기 잡초도 모두 우주의 조화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모두 잘 모셔야한다는 것이고, 이런 때 나와 자연이 하나이어서 우리의 환경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은 말년에 호를 일속자 (조한알), 일초(하나의 풀)”로 쓰셨고, 이렇게 밑으로 기고, 모시는 마음으로 서로 연대하여 함께 잘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고 자 평생 삶으로 실천하신 분입니다.

  원주의 협동조합운동은 이처럼 장일순 선생의 생명사상과 지 학순 주교의 지역자치운동이 결합이 되어 든든한 기반이 되었고 전국으로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즉 협동조합운동을 잘 전개시키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사상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협동운동은 생활을 바꾸는 삶의 운동이기 때문에 정신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으면 결국 실패로 끝난다는 것 입니다. 장일순선생님의 정신이 깃든 생명과 협동의 고향 원주에서 협동조합의 참뜻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동네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 이 동네는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글. 김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