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1-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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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화제의_판례.jpg | 조회수 | 1,189 |
화제의 판례 가끔씩 무료할 때면 대법원 홈페이지에 접속해 ‘화제의 판례’ 카테고리를 검색하곤 한다. 그 중에서도 세간을 경악케 한 사건들에 대한 판례를 보노라면 기분이 묘해진다. 인간은 얼마나 입체적인지! 판례 속에는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다. 피해자와 피고인 모두 나름의 사정이 있다. 가끔씩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도 존재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법리적 가치판단을 기준삼아 질서와 규범을 습득한다. 정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자주 얼굴을 바꾼다. 여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념은 없었다. 성선설을 믿기엔 무고한 죽음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보편타당한 윤리는 언제나 존재한다. 불편한 현상을 외면하는 평범한 악인들과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돛을 펼치는 선구자의 줄다리기 속에서 세상은 돌아간다. 전제조건은 공감이다. 누군가의 상황에 이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드물게 타인의 감정에 병적으로 무감한 경우가 있어 문제다. 강력범죄의 가해자로 자주 지목되곤 하는, ‘사이코패스’ 또는 ‘소시오패스’라 불리는 부류다. 이들의 존재가 대중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건 촉발요인이 특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분이 나빠서. 말을 듣지 않아서. 무시하는 거 같아서. 정이 안 붙어서. 어울려 사는 한, 서로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기본 상식마저 학습이 되지 않은 듯 보인다. 이쯤에서 사고를 조금 더 확장해 본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좋은 사람’이었나. 돌이켜보면 부조리를 방관하고 가벼운 관심으로 비극을 소비해왔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았고 굳이 나서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가 역설했던 ‘악의 평범성’과 비슷한 맥락이다. 사이코패스처럼 반사회적 성향을 띄거나 어떤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약자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무감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악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돌 던지는 데만 집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보다는 인과를 따져보고 더 이상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길 바란다. 물론 공감에서 비롯된 선량한 분노는 꼭 필요하다. 다만 공분의 결론이 그저 선과 악을 구별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죄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나의 자리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여태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나쳐온 슬픔들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속편한 애도를 갈음하련다.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 시인의 외침이 새삼스레 뼈아픈 새해다.
글 황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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