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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2] 새해니까 ‘다시’ 걸어볼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9
첨부파일 원주굽이길.jpg 조회수 1,268
새해니까 ‘다시’ 걸어볼까

사람들은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해가 바뀔 때마다 일 년 동안 어떻게 살 것인지 정성껏 계획을 세우곤 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목표라면 아무래도 운동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사는 게 바쁘다보니 운동은커녕, 기지개라도 제 때 펴면 다행인 나날이 이어지기 일쑤다. 어느새 2021년도 두 번째 달로 접어든다. 연초의 굳은 결심이 무색하게 시간만 흘러 아직까지 몸은 작년에 머물러있다 해도 섣불리 포기하지 말자. 우리는 슬로건이 무려 ‘건강’인 도시, 원주에 살고 있지 않은가.
지난 2017년부터 조성된 ‘원주굽이길’이 지난 2020년 12월에 완성됐다. ‘원주굽이길’은 문화와 생태자원을 연결하며 명칭 그대로 원주를 굽이도는 길이다. 전 구간 400km, 다시 말해 천리길이다. 코스는 원주 지역 읍면동 25개를 모두 경유한다. 편도 17개, 원점회귀 13개 구간으로 나눠지며 마을안길과 흙길, 숲길, 물길을 두루 걸을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코스로 구성됐다.

원주시청과 원주굽이길 안내센터 등에서 배포 중인 코스지도에 더욱 자세한 정보가 실려 있다. 코스별 난이도는 물론 주변 볼거리와 교통편까지 알 수 있어 유용하다. 코스마다 설치된 스탬프 인증도 색다른 재미다. 총 서른 개 코스를 완주한 뒤 스탬프가 찍힌 굽이길 패스포트를 제시하면 완보증 발급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패스포트 구입(10,000원, 현금 결제만 가능)과 완보 인증은 원주굽이길 안내센터에서 하면 된다.

 원주굽이길 안내센터 
 주소 | 원주시 서원대로 311 (명륜동, 원주종합운동장 2층) 
 운영시간 | 월~토 09:00~18:00 문의 | T.033-762-2080 





제가 한 번 걸어보겠습니다
마침 나는 굽이길 코스 4개가 지나는 지역에 살고 있지 않은가. 오랫동안 걷지 않아 근육이 다 빠져버린 종아리가 흐물흐물 나를 비웃었다. 네가? 어딜 걷는다고? 원래부터 운동과는 거리가 먼 성향인데다 코로나19 시국을 만나 칩거에 가까운 일상을 보내고 있던 터였다. 내 몸 상태와는 별개로 시시각각 통장을 조여 오는 마감날짜의 압박을 느끼며 길을 나섰다. 때는 바야흐로 시베리아 기단이 한반도에서 심술궂게 둥지를 틀었던 1월 중순 어느 날, 오후 한 시였다.

찬바람에 갈지 말지 수없이 고민했지만 여자가 칼을 뽑았으면 운동화 끈이라도 매야한다. ‘싸리치옛길’은 오래 전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가며 지나간 길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암만 내 몸이 무거워도 삼촌에게 폐위당한 어린 임금만 할까. 이정표 앞에 서자 뜻밖에도 힘이 솟는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 채 녹지 않아 길이 새하얗다. 미리 굽이길안내센터에서 받아온 패스포트와 지도를 살펴보며 더듬더듬 나아갔다. 지도에 표시된 첫 번째 거점인 ‘갈릴리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만났지. 나는 이 길에서 누구를 만나려나. 쓸데없는 망상 속에서 몇 컷 찍다보니 뭔가 다 이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만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발길을 마저 옮겼다.​



굽이길은 비교적 정비가 잘 된 길이라는 인상을 준다. 가는 길에 띄엄띄엄 설치된 이정표와 표식 때문이다. 날이 추워서인지, 눈 때문인지 아니면 평일이라선지 아무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걷는 사람이 나 뿐이었다. 안전상 두 사람 이상 동행하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차마 엄동설한에 우리 동네까지 와서 같이 걷자고 권하기가 어려웠다. 익숙한 길인데도 자꾸만 마음을 다잡게 된다. 다음엔 꼭 누구랑 같이 와야지.



겨울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막연한 낯섦을 뒤로하고 걷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사박사박 걸음마다 눈 밟는 소리가 평화롭다. 새들은 또 어찌나 귀엽게 지저귀는지. 그리고 자꾸만 가방 속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삼각김밥이 신경 쓰인다. 조금만 더 걸으면 쉼터가 나오니 그 때까지만 참아보기로 한다.



쉼터다. 삼각김밥을 꺼내려다말고 망설인다. 나는 정말 지금 배가 고픈가. 아니, 그냥 거짓식탐에 속고 있을 뿐이다. 마침 나에겐 여분의 초코과자가 있었다. 따끈한 유자차와 함께 한숨 돌리기로 한다. 이쯤 되면 먹으려고 한 건지, 걸으려고 한 건지 헷갈린다. 늦게 출발한 탓에 어느새 해가 기우는 느낌이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를 자못 힘차게 일으켜본다. 잠깐, 초코과자 하나만 더 먹고 가야지. ​



뜻하지 않은 폭포와 만났다. 평소에는 바위틈을 따라 졸졸 흐르는 물인데, 얼어붙어서 폭포처럼 된 모양이다. 눈 쌓인 오르막을 오르는 일은 그리 쉽지는 않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걸 보니 끝까지 가기는 어렵겠다. 어디까지 왔나 싶어 지도를 펼쳐보니 3분의 1지점도 못 미쳤다. 신이 나지 않는다. 나는 과정보단 결과가 중요한 사람인데, 그냥 차타고 올 걸 그랬나.



스탬프 인증함이 있는 싸리치정에 도착했다. 서둘러 스탬프부터 찍는다. 굽이길 지도에 안내된 ‘스탬프 잘 찍는 방법’대로 1초 정도만 꾹 눌렀다 놓으니 말끔하게 잘 나왔다. 겨울산은 해가 정말로 빨리 진다. 갑자기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는 느낌에 조바심이 났다. 다급한 손길로 가방을 열어 삼각김밥을 꺼냈다. 고소하고 찰진 것이 아주 그만이다. 갑자기 스스로가 한심해졌지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을 애써 떠올려본다. 자리를 정돈하며 다음번에는 반드시 아침 일찍 출발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아이젠, 등산스틱, 장갑, 배낭을 살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숫자가 바뀐다고 해서 꼭 철이 들지는 않는가보다. 팔팔한 정신연령과는 달리 갈수록 삐걱대는 몸을 이끌고 천천히 하산했다. 아무튼 잘 걸었다. 2021년도 힘내자! 나 자신!

 

 

 취재·글 황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