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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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포맷변환]15525253807574cf1d14ec3ab7eb772e7e37e606ba.jpg | 조회수 | 3,410 |
마을 어귀에 배가 한 척 놓여있다. 곳곳이 삭아 도저히 물 위에 뜰 수 없을 것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물이 아닌 흙 위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이곳은 바다 대신 섬강이 흐른다. 육로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수 십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다녔다고 하니, 이 배도 한때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너른 평야 사이로 흐르는 섬강을 배경 삼아 40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장남옥(60) 씨를 만났다. 쉴 틈 없는 사계절
어른 키 정도 되는 고추가 비닐하우스 안에 가득하다. 고추 줄기가 흔들리는 쪽을 찾아가니 수건을 둘러쓴 장 씨가 한창 고추를 수확하고 있다. “보통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고추는 이렇게 키가 커요. 열대 지방에서는 이것보다 더 커진 ‘고추나무’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장 씨 옆 수레에는 방금 딴 푸른 풋고추가 가득하다. 그중 몇 개는 붉다. 건고추다. “익은 정도의 차이에요. 풋고추는 주로 반찬이나 재료로 이용해요. 건고추는 고춧가루를 만들 때 써요. 특히 김장할 때 많이 쓰는 종이에요. 저희는 풋고추, 건고추를 다 재배해요.” 고추를 어떻게 재배하는지 물었다. “1월 말에서 2월 초에 파종을 해요. 2월 말에 가식(잠깐 심기)이라고, 묘판에 임시로 심어요. 그러다 4월 말에서 5월 초에 지금 이 비닐하우스로 옮겨서 정식(아주 심기)을 해요. 풋고추는 보통 6월 말부터 수확하고요, 건고추는 7월 말부터 수확해요.” 장 씨의 하루 일과가 궁금했다. “요즘 같은 계절에는 6시면 일어나요. 일어나서 하루 종일 수확하고 포장하다 6시에 끝내요. 여름에는 4시 30분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나서 밤 8시 반에 집에 가고요. 보통 해가 지면 집에 가는 거죠.(웃음)” 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해요.” 장 씨는 밖에서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늘 부지런하다. “꽃꽃이 같은 취미 생활도 좀 했었어요. 요즘은 정말 바빠서 못하지만요.” 처녀농군
으레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검게 그을리고 땀방울이 가득한 인상을 떠올리기 쉬운데, 장 씨는 이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만약 이곳에서 보지 않았더라면 대도시에서 일반 직장을 다니는 중년 여성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제가 올해 예순이에요. 농사를 한 지는 40년이 다 되어가요. 제 고향이 여기 호저면인데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시고 그 일을 돕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쪽을 업으로 삼게 됐어요.” 장 씨의 남편도 같은 직종, 같은 면 출신이다. “남편과는 같은 교회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어요. 남편 역시 농사를 짓고 있었고요.” 당시 농사를 짓던 장 씨의 어머니는 장 씨가 농사하는 집으로 시집을 안 가길 바랐다. 누구보다 이 일이 힘들고 고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저는 농사가 고생이라고 생각 안 했어요.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결혼할 때 사람만 좋으면 되지 싶었어요.” 장 씨는 자신을 ‘처녀농군’이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 어렸을 때도 여자가 농사를 짓는 일이 드물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냥 농사가 참 좋더라고요. 제가 5남매 중에 셋째인데요. 위에 언니, 오빠가 다 있는데도 이걸 하겠다고 했어요.(웃음) 지금 다른 형제는 다 도시에 나가 살고 있어요.” 이제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아들이 둘이에요. 작은 아들은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어요. 큰 아들은 이걸 하겠다고 서울에서 공부 마치고 돌아왔어요. 부모로서는 아쉬워요. 농사가 힘든 일이니까요, 우선은 생협에서 하는 공장에서 사회생활을 조금 더 해보라고 권했어요. 요즘 수명도 긴데(웃음) 50살부터 해도 늦지 않는다고 하면서요.” 젊은 시절 스스로 선택한 업이지만 장 씨도 힘든 순간이 있었을 법하다. “농사 하면서 무거운 박스를 자주 들었더니 허리가 망가지는 바람에 몇 달 전에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어요. 나이 들수록 몸이 약해지니깐 조금 힘들긴 하더라고요. 봄에 여러 작물을 한꺼번에 파종할 때도 힘들어요. 몸은 하난데 이거 하다가 저거 하다가 해야 하니까요. 정말 정신없어요.” 농사의 기쁨
장 씨는 40년 농사를 지으며 안 해 본 작물이 없다. “거의 다 해본 것 같은데요. 그나마 쉬웠던 농사는 옥수수랑 감자였어요. 옥수수는 큰 손 거치지 않아도 잘 자라고 잘 열리니까요. 감자도 비슷했어요.” 쌀, 배추, 무, 총각무(알타리무), 상추, 고추, 쪽파… 현재 장 씨 부부가 짓고 있는 작물 종류다. 논농사인 쌀은 장 씨의 남편이 맡고 밭농사는 장 씨가 맡고 있다. 논, 밭을 다 합쳐 약 만 평 정도다. “우리 두 사람이 주축이 되긴 하지만 일이 많으면 동네 주민분들이나 저희 큰아들이 도와줘요.” 다음 달 11월이 되면 김장용 채소를 수확한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배추도 뽑고 무도 뽑아야 돼요. 이제 곧 김장철이니까요.” 오늘은 고추와 쪽파, 총각무를 수확했다. “고추는 여름부터 열려서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거둬요. 쪽파는 더운 여름만 빼고 사계절 내내 계속해요. 이건 주로 김장용이나 파김치 재료로 많이 나가요. 총각무는 총각김치용으로 많이 나가고요. 그리고 무 같은 경우에는 겨울에 뽑아서 먹으면 정말 달고 맛있어요.” 농사는 유기농으로만 이뤄진다. 소비자에게는 이롭지만 생산자에게는 일반 농사보다 힘든 것이 유기농이다. “유기농이 힘들긴 힘들어요. 그런데 이런 농사를 하다 일반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유기농까지 왔는데 다시 일반으로 돌아가는 건 마음에서 허락하지 않더라고요.” ![]() 생산부터 포장까지 생산뿐만 아니라 포장까지 맡고 있다. 포장 작업장은 하우스 한 동을 터서 만들었다. 이곳에서 생협에 보낼 수확물을 포장한다. 오늘은 총각무다. 장 씨는 우선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깐다. 양을 맞추고 보다 빠르게 포장하기 위해서다. 깔아놓은 종이 위에 적당량의 총각무를 올려두고 양쪽에서 포갠 후 투명한 비닐 포장지에 넣는다. 이때 포갰던 종이만 다시 빼고 끈을 묶으면 한 단이 완성된다. 이렇게 하루 평균 100단을 만들어 생협에 납품한다. “총각무도 하고 상추나 쪽파도 포장해서 함께 나가요. 그럼 매일 플라스틱 바구니로 한 50~60상자가 나가요.” 장 씨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몇 단을 완성한다. “농사의 보람이요? 이렇게 잘 자란 것들을 보면 수시로 보람차요.” 선선한 가을이라 작업장 안이 시원하다. “사계절 내내 여기에서 작업해요. 올해 더웠던 여름에도 여기에다 선풍기 하나 두고 포장했어요.” 다음 여름이 오기 전에 에어컨 하나를 장만할 것을 제안했다. “에어컨 놓으면 당장 사람이야 시원하겠지만 식물은 안 그럴 수도 있어요. 여기에선 사람보다 식물이 더 싱싱한 게 중요해요.” 40년 농사 경력자의 지혜로운 대답과 함께, 차곡차곡 총각무 단이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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