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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이야기 [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5-31
첨부파일 어린이이야기2_4.jpg 조회수 3,095

 

어린이의 역사​

1960년대 프랑스 역사학자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s는 “16세기 이전까지 아동기라는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동기란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7~1901)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에의 주장 이후 “당시 높은 유아 사망률로 인해 유아를 향한 애착을 용인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근대 이전의 세계에는 전체 어린이의 1/3이 태어난 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불운한 상황 속에서도 ‘아동기(Childhood)’라는 영어 단어는 지금까지 1,0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즉, 아동기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의 주장과는 달리 사람들은 어린이에게 그리 무관심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린이 노동자

하지만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오늘날과 아주 달랐다. 보호의 대상인 지금과 달리 근대 영국에서는 하나의 생산 단위 역할이 더 컸다. 그래서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는 세 살부터 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가장 열악한 노동은 굴뚝 청소였다. 그들은 어른이 들어가기 힘든 좁고, 구불거리는 굴뚝 연도에 대신 들어가 일을​했다. 어린 굴뚝 청소부는 고된 일에 시달리다가 열두 살 정도가 됐을 때 대부분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이런 어린이 노동을 비현실적이거나 몰인정하다고 보지 않았다. 어린이는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9세기 중반까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굴뚝 청소뿐만 아니라 일반 공장에서도 어린이는 하루 12시간 내지 14시간 근무를 매주 6일간 근무하기도 했다. 먹는 음식도 묽은 죽이나 귀리 비스킷 등 형편없었다. 또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없어 위험한 기계 앞에서 먹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어린이 노동자는 입에 음식을 넣은 채로 잠들기도 했다.

이런 참상을 막기 위해 마침내 1833년 공장법이 도입되었다. 이 법을 통해 9세 이하 노동 정면 금지, 어린이 고용 시 나이 확인 의무, 9~13세 어린이 노동 하루 9시간 이내 제한, 13~18세 노동 하루 12시간 이내 제한, 어린이의 야간 노동 금지, 어린이에 대한 1일 2시간 이상 의무 교육 실시 등이 제정되었다.​


  


순종의 대상

 

한편, 당시 유복했던 집 어린이도 감내해야 할 고통이 있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중상류층 아이들은 대부분 엄마 뱃속에서 나온 순간부터 순종적이고 충실하고 정직하고 근면하고 꿋꿋하고 감정적으로 독립적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유아기 이후로 자녀가 기대할 수 있는 부모의 따뜻한 손길은 악수가 전부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생활도 열악한 경우가 많았다. 학교에 도착하면 찬물 목욕, 빈번한 매질, 저질 식사 등의 가혹한 대우를 당하기 일쑤였다. 기숙사도 흡사 형무소 같은 분위기였다. 구두 닦기부터 물 길어오기 같은 갖가지 잡일도 했다. 심지어 체벌도 당연한 분위기였다. 매일 한 번씩, 심한경우 여러 차례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빅토리아 시대의 어린이는 사랑과 보호의 대상이 아닌 순종의 대상이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부모의 간섭은 성년이 되어서도 결혼 상대, 직업, 생활방식, 정치 성향 선택권에서도 계속 되었다.​

 

한국의 어린이날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천도교의 사상을 바탕으로 ‘어린이’를 새롭게 정의하는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 선봉에는 아동문학가 방정환이 있었다. 1923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 행사가 천도교당에서 열리며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선언문에는 장유유서에 찌든 옛 질서와 어린이 노동을 없애고 배우고 놀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곧 어린이를 깨우치고 그들에게 권리를 부여해서 미래를 이끌 주체로 길러내는 일이 어린이운동에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어린이날은 ‘새싹이 돋아난다’는 의미로 5월 1일로 정해졌다가 1927년부터 5월 첫 번째 일요일로 날짜를 바꾸어 치러졌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946년 5월 5일 어린이날 전국준비 위원회와 어린이날 서울시준비위원회 공동 주최로 어린이날 기념식이 치러졌다. 이 자리에서 「소년˙소녀의 선서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요일과 관계없이 어린이날은 5월 5일로 정해졌고 1970년대에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한편, 방정환은 아이를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의 독립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처음으로 ‘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글·정리 이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