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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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_이승현_사무국장_1.jpg | 조회수 | 3,054 |
시민의 거대한 힘 보여준 계기 20대 후반의 청년은 이제 40대를 훌쩍 넘었다. 오랜기간 미군기지 문제로 현장을 누볐던 그가 현장 활동가로 주한미군 측과 힘겨운 싸움을 벌일 때 힘이 된것은 ‘시민들의 응원’이었다. 경적을 울리며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지자체와 시민단체, 시민이 하나로 뭉쳐 결국 주한미군의 사과와 피해보상을 받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전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를 만나 당시 상황을 들어봤다.
![]() ![]() Q 주한미군과의 싸움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2000년 캠프 롱에서 수도요금하고 전기요금 미납, 헬기장 소음피해가 있었어요. 당시 캠프롱은 인근 캠프이글 아파치 헬기부대 병참기지 역할도 하고 있었습니다. 헬기 이·착륙장이 캠프이글 부대 한쪽 끝 외곽에 있었고요. 미군 환자를 태운 시누크 헬기(CH-42)가 주로 왔어요. 프로펠러가 두 개나 달린 시누크 헬기가 오면 기왓장이 날아갈 정도였어요. 바람이 일반 헬기의 두 배입니다. 우리가 피해 입은 집에도 갔었죠. 기와집인데, 기왓장이 막 날아간다고 하더라고요. 헬기장으로 인한 피해가 없게 안쪽으로 옮겨달라고 여러 차례 원주시에 이야기하고 미군측에도 호소를 했어요. 그런데도 미군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헬기장 인근, 피해자 집 근처에 가서 현수막도 붙이고 시누크 헬기가 오는 사진을 찍기도 했어요.천주교원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와 원주시민연대가 계속 ‘헬기장 이전해라’ ‘수도·전기 요금 내라’ ‘환경오염 문제 사과하라’ 며 활동을 하던 중 2001년 5월 캠프롱에서 기름이유출되는 사고가 터진 겁니다. 캠프롱 기름유출은 원주MBC에 먼저 나왔어요. 한 주민이 농사를 짓는 논에 기름이 엄청나게 들어온다고 제보를 한 겁니다. 당시 원주MBC 김동희 기자가 방송을 해 전국적으로 파급효과가 컸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미군기지 환경문제를 주로 다루던 녹색연합이 성명을 냈어요. 5월에 문제가 터졌고 지역의 시민단체와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어요. Q 당시 시민사회단체 책임을 맡은 곳은 어디였나요. 원주시민연대와 천주교원주교구정의평화위윈회(이하 정평위)가 앞장 섰는데, 당시 정평위는 사무국과 실무자가 있었습니다. 사무실이 가톨릭센터 2층에 있었고 신부님들도 적극적으로 함께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2001년 5월 캠프롱 사태가 터지면서 지역 시민단체들로 확대되면서 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책임단체를 정평위와 원주 환경운동연합이 맡기로 했습니다. 책임단체 두 곳에서 실무자를 파견하게 됐는데 윤요왕 정평위 사무국장과 노형철 실무자, 그리고 환경운동연합에서는 제가 파견됐습니다. 그때는 출근을 캠프롱 앞으로 했어요. 그리고 천막농성이 바로 시작되었어요. 강력하게 대응을 하자고 해서 말입니다. Q 주한미군과의 싸움이 많이 부담스러울수도 있었을텐데요. 기존의 헬기장 소음피해와 수도·전기료 미납 등의 상황이 시민들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탄력을 받았는데 미군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캠프롱 기름유출 사고가 터졌고 시민들도 폭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막농성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는데 대다수 단체들이 부담스러워했어요. 미군기지 앞에서 천막농성 사례가 없었고, 그것이 가능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 부담부터 책임질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의견이 나왔어요. 천막농성을 한다고 해도 미군이 사과는 물론 피해보상도 안 할 확률이 높은데 우리가 끝까지 요구를 관철시키기 못하고 중간에 접을 수도 있지 않을까란 우려도 나왔고요. 그럼 무슨 명분으로 접을 것이냐? 천 년 만 년 천막농성을 할 것이냐? 등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정평위와 환경운동연합이 실무자를 파견하고 끝까지 가보자고 밀어 붙이면서 결의를 했습니다. Q 제일 감동 깊었던 순간이 있었다면. 천막농성이 시작되면서 언론에서 엄청 많은 관심을 가졌어요. 미군기지 앞에서 하는 전국 최초의 농성일 수도 있었으니 전국적으로 큰 이슈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시민들이 함께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토요집회는 이전부터 계속하고 있었는데, 내부에서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 미군기지 앞에서 토요집회를 할 때 입구 한쪽, 즉 시내에서 원주나들목 방향으로 가는 길에 운전자들이 볼 수 있도록,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미군기지 환경문제 해결을 원하시면 경적을 울려주세요’라는 문구를 게시해 놓았어요. 그런데 신호에 걸려 4차선 도로에 서 있던 차량들 모두 경적을 울리는 겁니다. 사회자가 멘트를 하는 것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모두 경적을 울렸습니다. 단골 경적 차량까지 생겼어요. 시내버스, 청소차 등 장난이 아니었어요. 이런 반응을 통해 시민 여론을 가늠할 수 있었지요. 후원금도 많이 들어왔어요. 아침에 농성장에서 자고 일어나면 천막 앞에 햄버거와 김밥, 물, 음료수 등이 쌓여있어요. 동화 속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렇게 경적이 갖는 의미가 어마어마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활동 덕분에 주한미군이 최초로 사과를 했습니다. 피해 보상도 약속했고요. 복원도 했습니다. 그렇게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시민의 힘이었습니다. 인간띠잇기 할 때 CIA한국지부에서도 왔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었지요. 지역사회가 부글부글 끓고, 언론에는 연일 나오니까 직접 확인을 온 것 같아요. 농성장에서의 분위기나 경적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죠. 미군 정보기관에서 도 심각하게 인지를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역시 전국 최초의 사례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였습니다. 지자체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는데 역시 시민의 힘이 컸지요. 시작은 시민단체에서 했지만 엄청난 파괴력을 만들어 낸 것은 시민들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Q 어렵고 힘들었던 일들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려웠던 점이라고 하면 시민단체의 내부 이견이었습니다. 거대한 사안이고, 거대한 대상이잖아요. 당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예를 들자면 우리 쪽에서 캠프롱에 의견을 내면, 미군은 직접 우리 의견을 안 받더라고요. 원주시나 경찰을 통해 의견을 내면 외교부로 가고 외교부에서 다시 미 대사관으로 가거나, 용산 미군기지로 갔어요. 그러니까 성역 같은 곳이었지요. 그런 것에 대한 시민사회의 고민이 있었어요. 이 싸움을 얼마나 어떻게 성과를 내고 언제까지 끌고 갈 수 있으며, 우리의 역량은 어느 정도인지 등 이런 고민,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부에서 다양한 견해 차이가 있었는데 이런 견해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로 간다는 것이 참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원주녹색연합이 생겼습니다. 윤요왕 국장이 중간에서 역할을 많이 했고, 그 중심에 고정배 신부님이 뚝심 있게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이동훈 신부님도 많은 힘을 실어주었고 수녀님들도 참여를 많이 했습니다. 일단 천주교가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누구도 터치를 못했어요. 공권력도 신부님들을 함부로 못했기 때문에 신부님들이 많은 역할을 해주었지요. 천막농성 하는데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신부님들이 책임지겠다고 까지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인간띠잇기 대회 할 때 등 운영비도 책임지겠다며 1,000만원을 만들어 오기도 했어요. 최기식 신부님도 큰 힘이 되었어요. 후원금도 꽤 모였고요. 당시 활동을하면서 수 천 만원을 지출했는데 지금 화폐가치로 따진다면 어마어마한 금액이기도 합니다. 천주교의 역할이 엄청 컸습니다.
Q 당시 대표적인 퍼포먼스가 있었다면. 인간 띠 잇기는 워낙 유명한 퍼포먼스였고요. 다른 것이 있다면 토요집회 끝나고 자장면을 먹으면서 의도적으로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있는 것 자체가 미군 측에는 큰 부담이었을테니까요. 우리의 상징은 검은 색이었는데, 기름이 죽음을 상징하잖아요. 검은색 천을 만들어서 흰색 화이트로 글씨를 써서 캠프롱 울타리에 달았습니다. 전국에서 많은 단체들이 방문을 하면 꼭 달고 갔어요. 정말 많은 천이 달려 있었습니다. 마찰도 있었지요. 철조망 안쪽에서는 계속 달지 말라고 하고, 우리는 천을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싸우고 그랬습니다. 많이 달리면 우리가 없을 때, 특히 밤에 잘때 미군 측에서 뜯어 버리더라고요. Q 실제 미군들하고 부딪힌 적도 있었는지 대표적인 사례는, 우리가 스티커로 미국 대통령에 대해 항의하는 것을 만들어 붙였습니다. 그러면 그 스티커보고 영어로 뭐라뭐라 하고 그래요. 대표적으로는 천막에서 자고있을 때 누가 칼로 천막을 막 찢어놓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미군이 그랬을 것으로 추측했죠. 에피소드 중 하나는, 토요집회를 하거나 상주를 하니까, 어느 날 봤더니, 미군들이개인 차량에 번호판을 안 붙이고 다니는 겁니다. 한 대가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대가 그러는 겁니다. 어떤 차는 번호판을 다른 곳에 붙이고 있기도 하고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미군이 과속하거나 함부로 운전할 때 단속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겁니다. 그래서 번호판을 떼어내고 다닌 거였어요. 우리가 미군이 상습적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토요집회 하던 날 무적차량인 스포츠카 한 대가 왔길래 스포츠카를 둘러싸고 꼼짝도 못하게 했어요. 미군이 차에서 2시간 정도 못 나왔어요. 미군도 철조망 안에 있으니까 못 나왔어요. 당시 경찰과 신부님이 협상을 했어요. 운전을 하던 미군은 캠프롱 한국인 관계자가 나와서 데리고 가고, 스포츠카는 견인차가 견인해 가기도 했지요. 그것도 전국 언론에 나왔어요. 그 문제를 해결했어요. 군용은 무적차량이 없는데 개인차량은 대부분 무적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Q 어쨌든 미군의 사과를 이끌어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있다면 상지대 서용찬 교수님이 분석을 했는데, 그 분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 환경부에 근무했어요. 미국 환경부가 미군을 관리하는데 너무 잘 아는 겁니다. 상지대에 시설이 있어서 분석을 해봤더니 미군만 쓰는 기름이 나온 거예요. 성분이 다른 기름인거죠. 그것이 나온 겁니다. 미군은 계속 부인을 하다가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서 손을 든 것 같아요. 지역사회의 분위기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팩트에 의해서 손을 든 셈이죠. 그 성분을 DNA분석하듯이 기름의 성분을 분석했으니까요. 미군이 쓰는 기름하고, 5월에 캠프롱에서 유출돼 분석한 기름하고 똑같은 겁니다. 이런 데이터를 내놓으니까 아무 말도 못 하고 꼼짝을 못한 거죠. 여기에 지자체와 언론,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니까 다른 방법 없이 몰린 거죠. 굉장히 빠르게 사과를 했어요. 천막농성을 시작하면서 시민들의 분위기가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Q 당시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밥은 대책위에서 먹고, 잠은 천막에서 자고, 차는 티코를 끌고 다녔고, 음향은 정평위 것을 사용했어요. 경찰들과의 에피소드도 많습니다. 엄청 많은 갈등이 있기도 했지만요. 토요집회 등을 하면 경찰서장이 오기도 했고, 다급하면 관용차 밖으로 나오기도 했어요.
Q 캠프롱은 지금도 여전히 반환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실상 지자체로 공이 넘어갔습니다. 관리 소유권은 국방부로 넘어왔지만 내부 오염원에 대한 조사나 그 결과에 따른 치유에 대해서, 내부 조사를 못하고 있습니다. 외부 조사는 했지만 말입니다. 미국이 반대해서 내부 오염 현황은 모르고 있습니다. 부대 외곽을 조사했는데 오염이 발견됐습니다. 이것은 무얼 말하냐면 내부도 당연히 오염된 곳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루 빨리 원주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야 할텐데 넘어야 할 산도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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