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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에세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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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린 여행
     

몇 해 전 여름, 나 홀로 일본 최북단에 자리 잡은 섬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으레 홋카이도 하면 겨울과 삿포로를 먼저 떠올리지만 당시 나의 여행은 그렇지 않았다. 한여름 여름 휴가철이었고 삿포로보다 하코다테와 후라노, 비에이에 집중했다. 사람이 많고 분위기가 화려한 여행지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가능하면 한적하고 자연에 가깝길 원한다. 굳이 이미지를 설명하자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든 영화 속 분위기랄까. 아니면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 식당> 곳도 좋다. 여백이 많은 장소가 좋다. 

4박 5일 동안 하코다테, 후라노, 비에이, 삿포로를 둘러봤다. 하코다테로 가는 기차 자유석이 만석이 되는 바람에 통로에서 캐리어를 의자 삼아 갔다. 하코다테 야경을 보며 나 혼자 이 풍경을 보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비 내리는 하코다테를 걷다 천둥이 치는 바람에 예정에도 없던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어느 문화재 건물에 들어갔다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한 직원 때문에 한참을 멀뚱히 서 있었다. 꼭 먹고 싶던 오징어먹물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 하필 쉬는 날이라 어쩔 수 없이 돌아섰다. 일본어로만 이뤄지는 관광버스를 탔다 나처럼 혼자 놀러온 일본인 할머니와 되도 않는 몸짓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내가 유일하게 알아들은 단어는 ‘다마네기’였다.) 그 할머니와 같이 원형 테이블에서 단둘이 점심을 먹었다. ‘익스큐즈미’ 소리에 뒤돌았더니 사진을 찍어달라는 젊은 여성의 요청에 ‘오케이’라고 대답했다가 바로 ‘한국분이시죠?’ 소리를 들었다. 영국식으로 꾸민 호텔에서 짐을 풀었다. 둘이 누워도 넉넉한 큰 침대에 혼자 누워 사색했다.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아 보트를 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특히 자주 들었던 음악은 밴드 ‘9와 숫자들’ 멤버 중 9(송재경)가 부른《문학소년》이었다.​

 

“세상이 궁금해서 들춰 본 책장 속엔 기대치 못한 슬픔과 고독만이 가득 했었고 (...)  몇 해를 난 후회로 보내야했네. 너무 길고 고단한 여행이 됐네.” 

- 9와 숫자들(송재경) 《문학소년》 가사


어쩐지 모든 일이 잘 안 되던 때였다. 하는 일과 그렇게 얻은 보수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만난 사람과 가지고 있던 취향, 살고 있는 장소 전부가 그럴듯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계획한 대로 삶이 굴러가지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알았다. 그전까지의 세상은 책을 읽는 것과도 다르지 않았음을. 그저 안전한 장소에서 타인이 겪은 일을 간접경험을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남은 건《문학소년》가사처럼 ‘기대치 못한 슬픔과 고독’이었다. 
그렇게 삿포로 어느 공원에 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이 어디냐며 다독이다가도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후회했다. 지나간 사람을 떠올리다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먹고 살까 잠시 고민했다. 어디서 들은 ‘불분명한 미래로 가는 한 줌 흙’을 되뇌다가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 몸’이라는 친구의 말도 삼켰다. 하루빨리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정리가 되길 원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바람처럼 몇 가지는 정리가 되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부드러운 일상을 살고 있다. 그리고 곧, 다시 홋카이도로 떠난다. 다음에 홋카이도에 올 땐 꼭 세상 가장 편하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랑 오겠다고 다짐했다. 실체 없고 불분명해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엄마와 떠나는 첫 여행이자 두 번째 홋카이도 방문이다.​

 


글 이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