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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에세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2-12
첨부파일 제주도.jpg 조회수 2,091

 여름, 혼자 떠난 제주도에서 남긴 메모들



아이돌 그룹 f(x)의 ‘4walls’ 뮤비가 촬영된 곳이라고도 하고 서울에서 막힌 콧구멍 뚫을 생각으로 간 곶자왈 환상숲. 어떤 가족이 일군 숲인데 현재 온 가족 구성원이 매 시간마다 돌면서 숲 해설을 맡고 있다. 나뭇가지가 서로 엉키다 한 몸이 된 것을 연리지라 하는데 두 나무가 모두 사는 경우도 있지만 한 나무만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걸 보고 목포에서 온 아저씨 감성 먹은 분이 한 나무가 죽은 것을 "잡년 잡놈이 만난 거라는 쉬운 표현을 쓰면 되지 않냐"는 농담을 해설사분께서 인용하면서 관람객들이 모두 웃는데, 도대체 어디가 웃음 포인트인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제주도에서 로또 맞았다. 하루 다섯 번 운행하는 950번 버스를 탔기 때문이다. 환승 할 필요없이 한방에 모슬포항까지 가는 노선인데, 우연히 시간대가 맞아 탔다. 탔는데 기사 아저씨랑 나 밖에 없어서 렌트카 수준으로 제주도 남서부 지역을 누볐다. 종점인 모슬포항까지 간다니깐 이 버스 한참 돌아가니깐 중간 지역에서 내려서 환승하라는 걸 귀찮아서 그냥 타고 가겠다고 했더니 길동무 생겼다며 좋아하신다. 9호선 급행열차 수준으로 수많은 정류장을 마구 지나치더니, 슬쩍 시계를 보고 너무 달려서 시간 조정에 실패했는지 과자 사 먹고 오라며 중간 지점에서 버스를 세웠다. 진짜로 내려서 과자 사​서 아저씨 한 봉지 드리고 에어컨 빵빵 틀며 신나게 모슬포항 까지 왔다. 과자 놓을 데가 없어 급한 대로 바짓가랑이 사이에 올려놓고 운전하는 아저씨가 허허벌판을 가리키며 "여기가 신공항 들어오려고 하던 곳이었어, 신도거든 여기가? 그게 동쪽에 들어서면서 여기 땅 산 사람들 많이 울었어." 투기 실패한 사람들의 눈물이 모여 신도 땅이 촉촉해졌다는 전설이 담긴 기념비석 하나 세워야겠다는 농담을 치려다 말고, 가만히 과자를 삼켰다.

작년에 혼자 제주도와 홋카이도를 다녀온 뒤 이왕이면 앞으로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또 다시 혼자 제주도에 두발을 대고 있다. 일상의 장소와 멀찍이 떨어진 채로 이방인 껍데기를 두르고 틈날 때마다 이것저것 기록하면서, 순간은 정말 짧고 인공지능 급이 아닌 이상 모든 현장을 세밀하게 기억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정과 생각을 싱싱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실시간'이 유용하다.

(어쩌다보니) 잦은 이직과 이사를 반복하면서 적응력 하나는 눈에 띄게 늘었다. 다르게 말하면 뻔뻔함이 늘었다. 잠잘 곳이 바뀌면 온 몸이 굳은 채로 송장처럼 잔다거나 처음 보는 사람 낯빛에 움츠러든 건 지난 날이다. 같은 땅과 공기, 시계를 공유하는 공통점이 이미 있는데 또 무슨 공통점을 찾아 진을 빼나 싶은 마음이 앞선다. 어차피 "흙으로 썩어 문드러질 몸"이니 평가나 분석, 비교, 계산과 방어, 감정 소모가 다 무슨 일인가 싶다.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그냥 즐기기엔 폭력적인 부분이 많다. 전시품으로 소개된 인물이나 사물을 다루는 방식이나 그것들이 무방비로 어린이나 심약자 관람객에게 전달 되는 방식이 그렇다.

20세기 초 황금만능주의, 개척 시대가 절정으로 치닫던 미국에서 사업가, 수집가였던 '로버트 리플리'가 닥치는 대로 긁어 모은 세계 여러 희귀 아이템을 박물관화 한 뒤, 입장료를 받고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아시아, 아프리카인들 옆에 웃음 짓고 있는 리플리 사진을 시작으로 전시품은 대기 제3세계 문화와 관​련된 것이 많다.

비슷한 시기, 런던 만국 박람회에 한켠에 '조선인 전시' 부스가 있었다. 이는 일본이 열강 서양 국가에게 내보이는 자신감의 표출이자 약자를 이용해 열등감을 숨기려는 행동이었다.

한 세기 전,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던 폭력적인 시선을 여전히 볼거리로서, 심지어 그것으로 돈을 벌고 있는 현상이 머뜩찮다. 리플리가 박물관을 만들어 관광 사업으로 활용하는 것이나 일본이 조선인을 전시품으로 내보인 것이 무슨 차이일까.
또, 뜬금없이 1차 세계 대전 철모가 전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 박물관에 있는 이유는 단지 '갑옷에서 나는 철을 재활용 하여 만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형태' 때문일까.
전시를 기획할 때, 아무리 볼거리 위주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전시 맥락과 개연성, 주제가 명확할 필요가 있다.

 

해안도로 끼고 달리는 버스를 타면 제주 시내까지 2시간이 걸린다. 계속 말하지만 해안도로가 지겨운 나는 "쾌적하고 빠르면서 안 가본 길로 가는 노선" 찾았고 마침내 755번 버스를 발견했다. 배차 간격이 경의중앙선만큼 깡패지만 한 번 타면 제주시내까지 1시간 채 걸리지 않는다. ‘꿀’ 노선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데 현지 마을 주민 아주머니가 대뜸 몇 시냐고 물어서 대답했더니 버스가 이미 가버렸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더니 '저 쪽' 정류장에 가더니 이곳에 바로 오는 버스가 있다면서 나를 불렀다. 기다린지 5분 채 되지도 않아 750번 버스를 탔다. 755번과 거의 비슷한데 급행 개념이라 제주 시내에 더 빨리 도착하는 ‘꿀꿀’ 노선이다.

내륙을 대각선으로 통과하며 본 창 밖은 온통 안개로 가득했고 버스 승객들도 대부분 나이 지긋한 현지 주민들뿐이었다. 이 분위기는 우연히 새별오름을 지나치면서 한껏 고무됐다. 스무 살 때 Y와 H와 제주도 여행을 와서 우연히 들린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땐 깊은 가을이었고 오름은 온통 갈색이었는데 지금은 안개를 탈의실 삼아 초록으로 마구 영글었다. 여름 타는 새별오름이다. 바다 없는 제주도 나쁘지 않다.



글 이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