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0-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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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흥법사지.jpg | 조회수 | 2,079 |
태조 왕건이 사랑한 진공대사와 흥법사 ![]() 구암 한백겸과 월봉 한기악, 한만년 일조각 사장 임경업 장군 추모비를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문막 방면으로 향했다. 손곡시비쉼터에서 문막 방면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한국 출판문화를 개척한 인물로 꼽히는 고(故) 한만년(1925~2004) 일조각 사장의 묘가 있다. 한만년 선생은 부친인 독립운동가 월봉 한기악(1898~1941)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30여 년 동안 월봉장학회를 운영하며 원주지역 학생 587명에게 1억2,536만6,000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 1948년 탐구당에 입사해 출판계에 입문했으며 1953년 일조각을 창업했다. 부친인 한기악 선생은 강원도 원성(原城)(현재의 원주) 출신으로 1919년 일본 도쿄에서 기독청년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했고, 3·1운동 때에는 임규, 심영택(沈英澤) 등과 독립선언서를 유인하여 각계에 배포하는 등 활약하다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19년 4월 13일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4월 22일경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2회 회의에서 남형우(南亨祐), 김응섭(金應燮)과 함께 임시정부 법무부 위원 3인 중 1인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초 귀국하여 중앙학교에 근무하다가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 1921년 11월부터 편집기자, 1924년 12월부터 1925년 3월까지는 편집국장 대리로 민족언론 창달에 전념하였다. 한편 동아일보에 근무하면서 1920년 7월에는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를 조직하고 오상근(吳祥根)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였으며, 그는 서무를 담당하여 청년운동을 벌였다. 1921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정기총회에서 61인의 대표자 중 한사람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나온 그는 시대일보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동년 10월에는 민족의 자립자활을 목표로 하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선전부 이사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 회에서는 1927년 2월 13일 기관지 <자활(自活)>을 발행하기도 했다. 1926년 3월에는 교육이 민족을 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사업이라고 판단하고 민립대학(民立大學)기성회를 조직하여 이종린, 박승철(朴勝喆), 최원순(崔元淳), 안재홍 등과 함께 대학 건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초에는 민족단일과 민족협동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망라한 민족 유일 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는데, 그는 동년 2월 15일 YMCA에서 안재홍, 신석우(申錫雨), 김준연, 이상재, 홍명희, 문일평(文一平), 한용운 등과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그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1년 5월 이 회가 해체될 때까지 구국운동을 벌였다. 1928년부터 1932년 4월까지는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으로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1935년부터는 다시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41년 6월 20일 학교 사택에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한기악 선생은 구암 한백겸의 후손으로 조선 초기에 고관대작이 연이어 배출되어 나라 안에서 큰 명성이 있던 청주 한씨 가문이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이 유명한 선조다. 한상경의 손자 한계희(韓繼禧)는 좌찬성의 고관에 올랐고 그 뒤로도 계속 벼슬하는 후손들이 이어졌다. 그 뒤 한동안 큰 벼슬이 없었는데 마침내 한백겸 형제가 나오면서 다시 크게 번창한다. 한백겸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화담 서경덕의 제자이던 습정(習靜) 민순(閔純)의 문하에 들어가 돈독하게 학문연마에 젊음을 바친다. 아버지야 판관벼슬에 일찍 세상을 떴으나 계부인 한효순은 고관대작으로 정승의 지위에 올라 많은 시비가 있던 분이다. 아우 한준겸은 문장에 뛰어난 고관으로 일세에 성망이 높던 분이었으나 한백겸은 과거시험에는 응하지 않고도 학문으로 천거 받아 호조좌랑·형조좌랑을 거쳐 황해도의 안악현감으로 2년여의 목민관 생활을 하면서 백성의 아픔을 몸소 느끼게 된다. 다시 함종현령을 지내고 영월군수에 부임했다. 51세에는 청주목사를 지내고 통정대부 당상관에 오른다. 장례원 판결사의 당상관직을 수행하고 호조참의라는 벼슬에 이른다. 60세에는 파주목사로 제수 받으나 사직하고 마지막 생애를 학문연구에 몰두한다. 죽음이 다가오는 64세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명저인 「동국지리지」의 저작을 마치고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세상을 떠난다. 한백겸의 계부가 정승이었고, 아들 한흥일도 정승이며, 아우 한준겸도 임금의 장인이자 대문장가로 큰 이름을 날렸으나, 역사는 그들 모두를 역력히 기억해주지 않는다. 오직 높은 학자적 태도로 훌륭한 저술인 ‘동국지리지’와 ‘기전도’·‘기전유제설’이라는 논문을 남긴 한백겸만을 역사는 영원히 기억해주고 있다. 학자와 학문, 그것만이 고관대작의 지위도 능가할 수 있고, 이름도 영원하게 역사에 남길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출처: 경향신문 2007년 8월,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5)실학적 역사학 창시 한백겸(上),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한백겸의 유적지 원주와 여주의 한백겸 유적지는 역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었다. 한백겸은 비록 서울에서 태어나 샛강과 한강이 만나는 어디쯤의 물이촌(오늘의 수색이나 상암동 어디쯤)에서 운명했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은거하며 살았던 원주의 부론면 노림리가 그의 고향이었다. 우리가 찾은 노림리는 어마어마했다던 한백겸 종가의 옛 자취를 잃고, 옛터에 반한옥 반양옥의 종가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마을이 오래됨을 증명하듯 몇 그루의 당산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나는 한백겸을 아노라고 뽐냈지만 말을 못하니 무엇을 알아볼 수가 있겠는가. 한치응은 둘째 아들이어서 종가에서 조금 떨어진 부론면 흥호리(興湖里) 월봉(月峯)마을에 자신의 종가가 있었다. 종가라야 터만 남았고, 양옥 한 채가 종가 터와 주변의 산소들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사는 집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3대 병조판서가 살았던 집이건만 집의 빈터에는 후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월봉 한기악(韓基岳)의 기념비 하나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바로 집 앞에는 한치응의 손자로 병조판서이던 한돈원의 묘소가 있었다. 한돈원은 한기악의 증조부가 되고 한민구·한홍구 교수는 바로 한기악의 손자들이다. 강원 원주와 경기도 여주를 경계해주는 섬강은 참으로 아름답다. 섬강 주변에 몇 집안의 남인 고가들이 있다. 흥호리에서 멀지 않는 우담(愚潭)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방계 선조인 우담 정시한(丁時翰)의 고향이다. 숙종 때 재야의 대학자 정시한은 다산의 학문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담의 현손(玄孫)이 바로 홍문제학에 형조판서를 지낸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다. 번암 채제공의 친구로 다산의 집안과는 가까운 일가이자 다산의 선학으로 정조의 치세에 큰 역할을 했던 학자 관인이었다. 바로 흥호리와 우담 마을이 남인의 명성을 높이 올린 마을이었다. 섬강의 아름다운 풍광과 지령(地靈)으로 인물을 배출한 곳이었으리라. 한백겸이 살았던 노림리에서 섬강을 건너면 여주 땅이고, 섬강에 가마솥 같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섬강이 돌아서 흐르기 때문에 섬과 같이 보여 부도(釜島)라 칭하거나 우리말인 가마섬(佳麻島)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람한 신도비를 둘러본다. 풍수설에 의하여 거북의 머리를 틀어올렸고, 그 거북이 위에 거대한 비석이 바로 구암의 신도비다. 당대의 대제학 우복 정경세의 글에, 명필가이자 판서를 지낸 죽남(竹南)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고, 충신이자 전서(篆書)의 대가 선원 김상용(金尙容)의 당질인 참찬(參贊) 김광욱(金光煜)의 전서로 새긴 비였다. 빗돌도 질이 좋아 400년의 세월에도 글씨를 대부분 알아볼 수 있었으니 국보급의 유물이 아닐 수 없었다. 후손들과 함께 돌아보는 한씨들의 선산, 한백겸의 묘소도 초라하지 않았다. 거대한 문인석에 선비의 묘소로는 부족함이 없게 잘 관리됐다.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이 우의정이었고, 아우 한준겸이 인조대왕의 국구였기에 그곳 일대는 대부분 한씨 소유의 사패지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토지제도의 변천으로 얼마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광활한 산야가 대부분 한씨들의 종중 소유라니 역시 대단했다. 세월은 흘렀고 세상도 변했다. 당시만 해도 노림리나 흥호리에서 가마섬 마을을 찾으려면 섬강의 나루를 건너면 됐다. 지금은 나루터나 나룻배는 없어졌어도 샛길까지 아무리 좁은 길도 모두 포장되어 차로 움직이는 데는 전혀 불편이 없었다. 이런 것이 바로 문명의 이기가 아니던가.
칠봉서원의 옛터는 흔적도 없었다 아들이 정승에 오르고 조카딸이 왕비에 오르자 한백겸은 뒷날 영의정에 증직되고 자신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세운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을 모신 칠봉서원(七峯書院)에 배향된다. 운곡 원천석은 원주의 치악산에 숨어살면서 조선 초기 선비들이 변절하던 시절에 절의를 끝까지 지킨 지조 높은 선비였다. 태종이 3번이나 원주의 치악산까지 찾아와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도를 지키고 학문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원주에 세운 서원이 바로 칠봉서원이다. 이 서원의 건립에는 한백겸의 공이 컸다. 뒷세상의 후학들이 구암의 학덕과 서원 세운 공을 기리려고 그 서원에 배향했으나 대원군 시절에 훼철된 이후 지금은종적도 없어져 후손들도 찾을 길이 없다고 해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출처: 경향신문 2007년 8월,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6)실학적 역사학 창시 한백겸(下),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고려 태조 왕건이 사랑한 진공대사와 흥법사지 잠시 구암 한백겸 선생과 월봉 한기악 선생, 일조각 한만년 선생 생각에 빠진 뒤 우리 일행은 일명 박수고개(부문재)를 넘어 문막읍 내로 향했다. 흥법사지를 가기 위해서는 문막읍 내를 통과해야 했는데, 가는 도중 사모님께서 문막새마을금고를 발견하고 결혼기념 45주년 축하금을 받아야 한다며 잠시 머물기를 요청했다. 볼일을 마친 뒤 다시 안창리로 길을 떠나본다. 원주방면으로 향하다 동화교를 건너기 직전 안창리 방면으로 들어서 5분여를 달리다 보면 안창대교를 만나고, 안창대교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작은 길을 따라 5분여를 올라가니 흥법사지 삼층석탑과 탑비가 반갑다.
흥법사지의 진공대사탑비는 불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진공대사탑비는 고려 태조 왕건이 손수 비문을 짓고, 당 태종의 글자를 집자하여 새긴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폐사지의 경우 탑과 탑비가 이별하고 있는데 비해 흥법사지는 탑과 탑비의 비신과 귀부 및 이수가 이별한 경우다. 더욱 아쉬운 것은 탑비의 비신은 현재 위아래로 절단이 되고, 아래쪽은 다시 삼등분으로 파절이 되어 중간 부분이 유실되었다. 이로 인해 중간 부분은 판독을 할 수가 없는 상태라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임진왜란 전에 이미 절이 폐사가 되어, 전쟁 때 왜병들이 비신을 반출하려다 그만두고 원주 감영에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비문이 새겨진 비신은 절단되었고, 이 고을 수령에 의해 도랑에 처박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가, 그 뒤 여러 동강으로 깨어져 지금은 남아있는 두 동강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숙종 때 <대동금석서 大東金石書>를 쓴 이우(李俁)는 다음과 같이 시를 남겼다.
“옛 절에 튼튼하게 감추어 두었는데 한밤을 틈타 몰래 훔쳐 간 이 누구인가 띠로는 지붕을 이지 못하니 비바람 마구 몰아치누나 임금의 글에 교룡이 흐느끼고 왕의 문장에 은하수 근심하네 부처님 일찍이 눈물 흘리신 것은 다만 견우직녀 만남을 시샘해서가 아니네”
진공대사(869~940) 탑비는 고려 태조 왕건이 글을 짓고 당 태종의 글자를 모아 새겼기에 탑비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 실려 있으며, 그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서기 940년(태조 23)에 진공대사가 입적하여, 왕이 친히 비문을 짓고 최광윤에게 명하여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다는 것이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 적극적으로 승려의 탑비를 건립하게 하는데, 태조가 직접 비문을 짓는 경우는 드물기에 당시 흥법사가 태조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할 수 있다. 당시 흥법사가 있는 원주는 개성과 강원도, 경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고 이쪽 신라 유민들을 달랠 필요가 있었고, 또한 고려라는 새 왕조의 등장을 이 지역에 알리기 위해 손수 탑비의 비문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세가 태조 23년조에 ‘왕사충담사수탑우원주영봉산흥법사친제비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충담은 진공대사의 속명으로 신라대 사람인데 당나라에 가서 수도하고 돌아와 고려 건국 후 태조의 왕사가 되었다. 태조 23년(940)에 입적하자 태조가 비문을 친찬하였다고 하였으나, 고려 초기에 이미 이곳에 흥법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에는 진공대사가 신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계율을 배우다가 당나라에 들어가 원정(圓淨)의 법을 수학하고 돌아온 내용, 태조로부터 왕사의 예우를 받고 태조의 명을 받아 흥법사에 주석하다가 입적한 생애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만법(萬法)은 모두 공(空)한 것이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나려 하니 너희는 일심(一心)을 근본 삼아 부지런히 정진하라.” 진공대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흥법사지에는 傳 흥법사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진공대사탑 및 부석관(보물 제 365호),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 463호),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64호)가 있었으나, 이중에서 傳 흥법사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진공대사탑 및 부석관(보물 제 365호)은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경복궁 경내로 옮겨졌으며, 2005년 10월 28일 용산 국립중앙 박물관이 개소되면서 경내에 보관하고 있다.
태조 왕건 친제(親制)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지의 조성 배경 정성권 동국대 교수의 「태조 왕건 친제(親制)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지의 조성 배경」 논문에 따르면 태조 왕건 재위기간 비문이 작성되거나 탑비가 건립된 사례는 11건으로 확인된다. 대부분의 탑비는 최언위에 의해 작성되었다. 하지만 유독 흥법사 진공대사 탑비만 태조 왕건이 비문을 친제하였다. 기존의 연구는 신라 불교의 정통성이 고려로 이어졌다는 것을 태조 왕건이 보여주기 위해 진공대사 탑비를 작성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정 교수는 더 본질적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진공대사 탑비 비문과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개태사화엄법회소」와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을 분석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장소에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을 세우고 낙성식에서 「개태사화엄법회소」를 직접 작성했다.(충남 논산의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을 세운 장소는 후백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장소다.) 그 이유로는 후백제 유민들에게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범을 선포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조 왕건은 신라의 유민들에게 통일왕조 고려의 등장을 직접 선언하기 위해서 진공대사 탑비를 친제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 근거로 진공대사 탑비는 앞 시대에 조성된 탑비보다 역동성과 활력이 넘치며 크기 역시 대형으로 조성됐다. 이는 새로운 왕조의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태조 왕건은 자신이 직접 비문을 작성한 탑비의 영향력이 어떠한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흥법사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신이 직접 작성한 탑비를 건립한 것이다. 흥법사는 현 강원도나 경상도의 구 신라 유민들이 개경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되는 병목과 같은 교통의 요지다. 특히 일반적인 탑비의 위치와 다르게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비가 사찰의 중심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흥법사를 방문하는 모든 행인들이 이 탑비를 볼 수 있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즉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비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상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발을 알리는 상징 조형물로 해석이 가능하다. 글 원상호 사진 원춘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