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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돌아보기 [4] 반계리 은행나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2-25
첨부파일 반계리_은행나무.jpg 조회수 2,178

 전설의 반계리 은행나무



반계리 은행나무

흥법사지에서 역동적인 진공국사탑비의 이수와 귀부를 자세하게 본 뒤 조엄기념관으로 가는 대신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고 가기로 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모님과 박사 학위를 받은 금 교수님은 명륜당 앞 은행나무가 600년이 되었는데,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고 싶어 했다. 흥법사지에서 다시 문막읍 내를 지나 여주방면 옛 길로 20여 분을 가다보면 반계리 마을 뒤쪽에 은행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를 본 노부부는 800여 년을 이 자리에서 보낸 은행나무를 보고 성균관대 은행나무보다 훨씬 아름답고 거대하다며 놀랐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문막읍 반계리에 있다. 1964년 1월 31일 천연기념물 제167호로 지정됐다. 이 은행나무의 나이는 800~1,0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2m, 둘레 16.27m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전체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표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고 2~3m 높이에서 다시 갈라져서 가지가 사방으로 고루 퍼져 큰 수관을 이루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살던 성주 이 씨의 한 사람이 나무를 심고 관리하다가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큰 스님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물을 마시고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 지팡이가 자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이 나무 안에 흰 뱀이 살고 있어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겼으며, 가을에 단풍이 한꺼번에 들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앵무새가 많이 살았다고 해 앵당산(鸚堂山)이라 부르는 산 남쪽 계곡에 옛날 용운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 모셨던 석불이 폭우에 떠내려와 땅 속에 묻힌 것을 발굴해 모신 것이다. 주변에서 용운사라는 명문(銘文, 기록)이 있는 와편(瓦片)이 발견돼 알게 됐다.솔잎상투 같은 나발을 구레나룻까지 두툼하고 선명하게 새겼다. 호선 또한 분명하고 두 눈은 반쯤 뜨고 있다. 삼도가 생략된 목은 잘린 것을 다시 모시면서 붙여 놓았고 수인은 비로자나불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지권인(智拳印)이다. 의문(衣紋, 옷주름)은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보물 제99호)과 유사한 나말려초(羅末麗初)의 특징인 유수문(流水紋, 물결무늬)을 하고 있다. 광배는 복원하면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모셨는데 조각이 나긴 했으나 볼수록 일품이다. 광배 중앙에는 토실한 네 개의 연잎 사이로 다시 네 잎을 두었고 당초문(唐草紋)에 화염문(火焰紋)을 밖으로 둘러 완벽하다. 좌대는 사각으로 상중하대를 구성했는데 이 또한 약간 눈에 설기는 해도 한참을 들여다보면 불상의 몸체를 상당히 안정적으로 모셔 놨음을 느낄 수 있다. 상대는 단판으로, 하대는 복판으로 특히 하대의 각 모서리에는 귀꽃을 새기듯이 해놓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중대의 안상은 평이함 속에서 비상함이 묻어난다.목이 없는 솔봉이 같은 석불을 먼저 모셨는데 촌로의 꿈에 내 목을 찾아오라는 말에 온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탑 옆에서 머리를 찾아내 모시고 지금도 매년 동제(洞祭)를 올려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한​다.바로 옆에는 용운사지 삼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3호)이 같이 있어 서로 의지하는 듯 부처님이 조금 덜 외로워 보인다. 옮겨 오면서 원형과는 많이 달라지기는 했어도 탑의 맨 윗부분에 복발과 앙화, 보륜은 격식을 갖추려 한 정성이 보인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용곡도예

4곳의 폐사지를 둘러보는 데만 꼬박 반나절이 넘게 걸렸다. 오전 8시에 출발해 점심 장소에 도착한 것이 오후 1시를 넘었다. 노부부는 시장할 법도 한데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용곡도예의 주인장은 도자기를 굽는 분인데 요즘은 가야금에 푹 빠져 지내시는지 주방 앞쪽 컴퓨터 모니터에서는 열심히 가야금 강의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일 먼저 나온 음식은 싱싱한 야채에 오디를 소스로 한 샐러드와 고르곤졸라 풍의 치즈 피자였다. 피자에 샐러드를 싸서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다. 반찬으로 백김치와 총각무를 놓았는데, 사모님은 자신의 입맛에 꼭 맞는다며 좋아했다. 금 교수님은 치아가 좋지 않아 백김치만 맛있게 드신다. 이어 비름나물과 고추나물, 더덕구이 등의 나물 반찬이 나오고, 된장찌개도 나온다. 정말 맛있게 식사를 마친 뒤에는 목련차가 어여쁜 다기와 함께 나와, 그 향이 아주 제법이다.

성공회원주교회와 나눔의집


천주교 신자인 노부부지만 금 교수님은 잘 안 나가고, 사모님만 열심히 나간다고 한다. 해월 선생 피체지를 가는 중에 성공회원주교회가 있다고 하니, 들려보고 싶다고 하신다. 사모님만 성당 안에 들어가 보고, 좋아라 하신다.
성공회원주교회는 1996년 9월 당시 충주교회 관할사제인 권희연 미카엘 신부님 인도로 원주YMCA 2층 강당에서 원주교회 신자 5가정이 모여 첫 감사성찬례를 드렸다. 이후 1999년 6월 학성동에서 원주교회(기도소) 및 원주나눔의집 축복식을 가졌다.

2007년 6월 학성동에서 지금의 호저로 둥지를 옮겼다. 당시에는 김경현 신부님이 계셨고 나눔의집 대표도 맡았다. 그동안에 국충국 신부가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했고, 지금은 이쁜​이 신부가 나눔의집 대표와 대표 사제로 있다.

원주나눔의집은 1999년 6월 원주시 학성동 골목에 문을 열고 무료한방진료와 저소득층 아동 방과후 공부방, 가정결연 반찬 배달활동을 시작한 성공회 원주나눔의집이 어느덧 20년째를 맞이했다. 정기적인 나눔 후원 행사와 적극적인 후원인 발굴로 2003년에는 월 정기후원금 100만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1999년부터 운영해 오던 햇살공부방이 원주지역 최초의 지역아동센터로 지정돼 보다 안정적인 운영 시스템을 갖추게 되는 성과도 올렸다. 이후 사회적일자리 사업을 통해 재가복지 서비스 지역을 원주 시내 지역 외에 호저면과 흥업면, 귀래면, 부론면, 지정면, 문막읍 등 농촌지역까지 홈헬퍼 파견지역을 확대하기에 이른다. 2007년 호저면으로 성공회 나눔의집과 교회가 이전하면서 학성동은 아동 돌봄 전용 공간으로 탈바꿈 됐다.

농촌지역에 자리를 잡은 나눔의집은 농촌지역 마을도서관 만들기와 어르신들의 여가문화 프로그램 늘봄학교를 운영하며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실천하고 있다. 2008년에는 노인복지센터 및 장기요양기관으로 등록해 농촌지역 어르신 돌봄사업을 전문적으로 전개하게 된​다. 원주시와 협력해 호저지역 결식아동 급식사업 진행은 물론 여성일자리 지원사업의 하나인 가사관리사 파견사업단인 ‘우렁각시’도 출범시켰다. 호저면으로 이전한 나눔의집은 농촌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나눔의집과 교회 공간의 경우 주중에는 마을 주민들의 문화여가 활동 공간으로 사용하면서부터다. 풍물교실, 난타북, 몸펴기 운동, 작은 도서관, 어르신들의 늘봄학교, 클라라 공방, 마을카페 초록햇살 등 다양한 문화예술활동 프로그램으로 주민들이 북적이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포근한 쉼터가 되어 주고 싶은 학성동 햇살지역아동센터와 대학 진학보다 사회 진출을 준비해야 하는 친구들을 위한 청소년 진로자립지원센터 ‘때때’는 풍성한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의 진로 개발과 자립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9년에는 (예비)사회적기업인 ‘사회적협동조합 원주행복한돌봄’이 본격적인 돌봄 활동에 나서면서 지역에서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해월선생 피체지

 

성공회원주교회를 잠시 둘러본 뒤 해월 선생 피체지를 가기 위해 호저면 고산리 쪽으로 뉴코란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0여 분을 가다보면 고산초등학교 못미처 왼쪽으로 해월 선생 피체지인 송골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입구에서 200여 m를 올라가면 ‘피체지’를 알리는 작은 간판을 만날 수 있고 왼쪽으로 차머리를 틀고 100여 m 정도 가면 오른쪽 언덕에 해월 선생이 숨어있던 원진여 님의 복원된 집을 만날 수 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호저면 고산리 송골마을 야트막한 산 아래 원진여 님의 집에서 1898년 4월 5일 관헌에 의해 체포됐다. 그 집을 복원했는데, 차가 접근하기에 쉽지 않아 차 안에서 둘러본 뒤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해월 선생 추모비도 차 안에서 가볍게 보기만 했다. 비엔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을 기리며’라고 쓰여 있다. 
동학 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1827~1898) 선생의 피체지, 즉 관군에 체포된 곳이다. 무위당은 유년시절 집 근처에 있던 천도교의 포교소에서 오창세를 통해 동학을 접했고 “밥 한 그릇 속에 우주가 있다”는 해월의 생명사상을 이어받았다. “농부의 피땀과 하늘과 우주가 도와줘야 밥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모든 생명이 희생하고 우주의 운행이 있​어야 사람도 살고 밥도 생기는 것이지요. 무위당은 해월의 사상과 일맥상통합니다.”(김종철 선생) 
해월이 체포된 원진녀라는 인물의 생가는 최시형 선생이 동학농민운동이 좌절된 뒤 머무르던 곳이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이곳은 집터만 남아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1990년 원주 치악고미술동우회가 비석과 추모비를 건립했고, 원주 고산리 대동회가 시 보조금과 마을기금으로 생가를 복원했다. 생가 부근 도로변에 1990년 세워진 추모비에는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라는 무위당의 글이 새겨져 있다. ‘최보따리’는 30여년이란 긴 세월 동안 가벼운 보따리를 든 행장으로 도피와 포교활동을 해서 붙은 해월의 별명이다. 복원됐다고는 하지만 생가 주변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듯 콘크리트 구조물이 널려 있고 표지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1898년 4월5일 체포된 해월은 서울로 압송된 지 두 달 만인 6월2일 사형됐다. 해월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는 아이러니컬하게 고부군수를 지낸 조병갑이다. 가혹한 수탈로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다. “이런 현실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김종철 선생이 말이 떠오르게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뒤 해월 최시형 선생은 처음 도피처인 강원도에 다시 의지하게 된다. ≪천도교창건사≫에는 “갑오 12월 24일로 끝마친 동란의 여파로 나라에서 여당을 진멸코자 하여, 우선 그 괴수되는 신사를 체포코자 각지에 수사망을 치고 천하에 명하여 대색(大索)하는 지라, 신사 손병희, 손병흠, 손천민, 김연국으로 더불어 홍천에 잠유하다가…”라 하여 동학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탐색이 살벌하게 진행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기록 중에 1898년 2월 그믐에 여주 임학선(林學善)의 주선으로 원주군 송동(松洞, 지금의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마을)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체포됨으로서 해월 최시형 선생의 38년 도피 여정이 마무리된다. 당시 손병희는 송골에서 5리 가량 떨어진 섬배(지금의 원주시 소초면 의관리 윗섬배) 이화경의 집에 머물고 있었고, 김연국은 옥직리(지금의 횡성군 서원면 옥계리 옥지기)에 있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이후 많은 이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으며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특히 해월을 존경했다.

장일순은 1970년대부터 가톨릭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민주화 운동을 했고, 1977년부터 생명살림 운동을 전개해 현재 유기농생산물 생산자 소비자 조직인 ’한살림 생협’을 세웠다.

무위당기념관

 

1997년식 뉴코란도는 다시 원주시 내로 향한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무위당기념관에 들리기 위해서다. 잠시 후 우리 일행은 원주시 중앙로에 자리 잡은 밝음신협 건물에 도착했다. 

‘그는 순한 물 같고, 편안한 흙 같은 분이었다.’ 
계단을 올라 4층 기념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도종환 시인이 쓴 글 ‘장일순’이 답사객을 맞이한다. 무위당 사상을 소개한 현판도 있다.
‘무위당의 생명사상은 사람에서 티끌까지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고, 그늘이 있어 햇살이 있듯이 이 모든 것이 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이다. 아주 작은 좁쌀 한 알에, 혹은 평범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속에 이미 생명의 뜻이 있는 것이다.’
무위당이 생전에 남긴 서화들 중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한문으로 옮겨 쓴 병풍이 한 구석에 세워져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를 ‘신빈(神貧)’으로 한역했다. ‘거룩한 가난’이라, 무위당다운 표현이다. 무위당기념관에 도착하니 동주 심상덕 관장님과 김찬수 상임이사님 ​등이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기념관에 전시된 무위당 선생님의 작품을 하나 하나 꼼꼼하게 감상하던 노부부에게 최근 나온 「장일순 평전」을 선물했다.

 

밝음의원 갤러리

마침 근처에서 일이 있던 곽병은 원장님께서 금 교수님 부부와 무위당기념관에 들렀다고 전하자, 밝음의원 갤러리에서 보자고 하신다. 곽 원장님은 최근 남미 일대를 40여일이 넘게 다녀오셨는데, 그때 촬영한 사진을 인화해 전시 중에 있었다. 곽 원장님 부부가 다녀온 곳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안데스를 비롯해 칠레의 파타고니아, 푸에르토 나탈레스, 산티아고 등이었다. 크루즈 여행을 하면서는 칠레와 페루, 에콰도르, 코스타리카, 멕시코의 와툴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카보 산 루카스였다. 이후 미국으로 와 친척들이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와 웨이코, 애틀란타를 거쳐 귀국했다. 그때의 사진 200여 장이 빼곡하게 밝음의원 갤러리에 전시됐다.

금 교수님 부부는 꼼꼼하게 사진들을 살펴보며 감탄과 부러움을 보내기도 했다.
시간이 벌써 오후 5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너무 늦으면 안 되기에 서둘러 대안리로 향했다.

 

천연기념물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79호)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천연기념물 느티나무를 둘러보기로 했다. 1982년 11월 4일 천연기념물 제279호로 지정된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는 추정수령 400년인 노거수다. 나무높이 22m, 가슴높이 줄기둘레 7.6m, 뿌리목 줄기둘레 9.8m, 가지 밑 줄기높이 2m다. 가지퍼짐은 동쪽 13.5m, 서쪽 11.3m, 남쪽 11m, 북쪽 13m다.

이 느티나무는 그늘이 짙으며 수관이 넓게 퍼져, 수세가 강건하고 수형이 아름답다. 정자나무라고도 하며 산기슭과 농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를 믿음직한 마을의 간판, 지킴이로 여기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느티나무에 얽힌 전설이나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은 없다. 다만, 혹자는 이 느티나무가 회룡고조(回龍顧祖)형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영험하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옛날엔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 느티나무 아래서 정성껏 치성을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옛 금물산면 터 앞 700년 소나무의 자태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를 보고 농로를 따라 왼쪽으로 접어들면 옛 면사무소(今勿山面) 터 앞에 700여 년이 된 커다란 소나무가 있는데, 이는 서낭당 나무로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는 존재라 여긴다. 한쪽 가지가 꺾이면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위세가 당당하다. 

 

다시 청향당으로
이른 아침 출발했던 금 교수님 부부가 거처하고 있는 청향당으로 다시 돌아왔다. 떠났으니 돌아오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 삶 자체와 얼마나 똑같은가. 누구나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피할 방법이 없다. 잘나고 못나고도 없다.
(끝)

글·사진 원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