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0-0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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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민주화운동_기념일.jpg | 조회수 | 1,882 |
암흑의 시대를 넘어 생명사상으로 1979년 10·26사태는 군사독재정권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80년에 불어 온 민주화의 봄을 통해 기나긴 억압속의 시간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듯 했다. 10·26사태 이후 전두환 씨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정권 찬탈 과정에서 발생한 5·18광주민주항쟁은 수많은 시민들의 피를 제물로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으며 민주화 운동에 새로운 이정표를 그었다. 광주민주항쟁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미국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을 통해 전 사회의 이슈로 부각시켜 80년대를 반미 의식 확산과 6·10 민주항쟁을 낳았고 민주화운동에 질적 양적으로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이런 도도한 흐름 뒤에 여전히 민주화의 성지 원주는 어머니 품처럼 늘 함께 했다. ![]() 부산 미문화원 방화(이하 부미방)사건과 원주 부미방 사건의 주역이었던 학생들은 당시 방화의 동기에 대해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5·18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은 반미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고 한미관계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는 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사회 변혁운동에서 이처럼 엄청난 의미를 갖는 부미방 사건의 주역들이 민주화의 성지 원주의 품으로 찾아 들었다. 먼저 5·18광주항쟁으로 수배를 받던 김현장 씨가 원주를 찾아 은신한데 이어 당국의 수배를 받던 문부식과 김은숙 씨까지 선배를 찾아 원주로 향한 것이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최선봉에 서 있던 천주교 원주교구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성직자는 교회의 품에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거부할 권리가 없고 불의와 폭압이 난무하는 시대에 교회는 고통받는 형제들과 가난한 이웃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을 받아들이고 자수를 권유했던 당시 가톨릭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 등은 1982년 4월5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취조실로 연행, 구속되면서 큰 고초를 치러야 했다.
1987년 6월 항쟁 부미방 사건은 원주를 다시 한 번 주목하게 했고 이를 빌미로 가톨릭을 점점 더 옥죄어 오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의 열기는 수면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동안 민중의 든든한 방패역할을 해오던 가톨릭마저 ‘빨갱이 양성소’로 손가락질 당하는 등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신군부의 탄압으로 원주에서는 민주화운동은 지하에서 문화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선 것이 바로 ‘원주민속연구회(1981)’다. 원주출신이면서 외지에서 대학을 다니던 박성욱, 김기봉 씨 등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뜻을 함께하며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연세대 원주캠퍼스와 상지대, 원주대 등 대학을 중심으로 민속연구회가 조직되는 등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의식화 모임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여기에 1985년 전국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비롯해 이창복, 김승오 신부, 김기봉 씨 등이 합류하며 전국규모의 재야조직 연대체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1987년 6월 항쟁 이전인 1986년 원주지역 송년회가 열린 당시 가톨릭교육원(현 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종교계와 학생·농민 등 지도자급 핵심인사 100여명이 모여 5·18을 기념하고 군부독재를 타도하자는 대대적인 봉기를 암묵적으로 합의하기에 이른다. 당시 참여했던 한 인사는 “가톨릭농민회 등 6월 항쟁 이전부터 많은 단체와 조직들의 힘이 축적되고 있었고 이런 단체들 중심으로 6월 항쟁을 주도했다”며 “지학순 주교와 원동성당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강원본부 핵심 관계자는 “확실한 것은 이때의 항쟁으로 군부독재는 분명하게 종식됐다는 것”이라며 “이날을 계기로 절대로 이 땅에서는 군사정권이 들어설 수 없다는 확신을 민중들의 힘으로 보여줬다”고 말했다. 또 “국가 공권력이 민중을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줬다”며 “앞으로도 군부가 지배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야 말로 6월 항쟁이 남긴 소중한 믿음”이라고 평가했다.
![]() 민주화운동과 생명사상 원주에서의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고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선생의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한 생명운동과 학생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이 혼재의 시기를 맞는다. 80년대 중반에는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 휘하에 있으면서 1970년대 민주화를 이끌었던 김영주, 박재일 씨 등 젊은 운동가들은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꾀하고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원주를 떠나기 시작한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학생조직은 대선을 앞두고 각기 다른 후보를 지원하는 비판적 지지세력과 후보단일화, 독자후보 진영으로 각각 구분되면서 내부노선에 대한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이즈음 장일순 선생은 지금까지의 방향만으로는 안 된다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김지하와 박재일, 최혜성, 서정록을 중심으로 공부모임을 시작, 1989년 ‘한살림 선언’을 세상에 내놓는다. 당시 민주화 운동에 깊숙하게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원주운동의 정신은 시대적 소명에 따른 변혁운동에 늘 동참했다는 것과 생명사상에 입각한 민중의 자립갱생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이라며 “이는 민주화의 열망에 목말라했던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원주만이 갖고 있는 고귀한 정신”이라고 말했다.
글 원상호 사진출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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