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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선언 30주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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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명의 지평을 바라보면서

한살림선언 30주년 부쳐​

모든 생명은 하나다. 30년 전 ‘온 지축을 울리고 대지를 뒤흔드는 뭇 중생의 아우성소리’에 화답하며 우리는 <한살림>을 선언하였다. <한살림선언>은 핵과 전쟁, 빈곤과 환경 파괴 등 죽임의 문명이 가져온 총체적 위기 인식과 시대 성찰에서 비롯되었다. <한살림선언>은 관념과 물질의 성패와 우열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위기를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위기의 본질은 좌우 이념이 아니라 산업문명의 근저에 도사린 반인간적, 반사회적, 반생태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살림선언>은 이 위기의 극복은 삼라만상 생명의 그물 속에서 이웃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통해 극복할 수 있으며, 죽임의 문명에서 서로 살리는 생명살림의 문명으로의 전환이야말로 시대의 요청이라고 호소하였다.


인간과 자연은 모두 분리할 수 없는 생명의 부분이자 전체이다. 모든 생명체와 사물은 소중한 생명을 품고 있기에 동등하게 존귀하며, 따라서 서로를 모시고 살리지 않으면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자연을 대상화하는 인간의 지배욕이 결국 인간의 소외와 공동체의 파괴로 귀결되었음은 역사 속에서 확인되었다. 한살림의 생명선언은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며 얻은 각성이자, 단선적 진화론과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다시 생명으로 돌아가자는 반성이다. 한 살림은 그 자체로 생명의 이념과 활동이며, <한살림선언>은 생명의 세계관을 확립하고 모심과 살림의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해나가자는 시대 선언이었다.

 

지난 세기말에 발표한 이 전환의 논리는 30년이 흐른 지금도 의연하다. 20세기말 위기의 징후들은 21세기에 들어 지구인의 일상을 위협하는 극단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최근 연구들은 2030년에서 2052년 사이 지구의 평균온도가 산업화 이전에 비해 1.5℃ 이상 상승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의 예측치보다 훨씬 빠르게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2050년 무렵 지구 육지의 35%, 지구 인구의 55%가 생존의 문턱을 넘어서는 치명적인 조건에 노출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문명의 위기 앞에서 인간의 욕망은 20세기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의 관성과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사멸하는 산업문명을 연장하기 위한 강대국 간 금융·무역 지배권 쟁탈, 군비확장, 테러와 살상, 환경파괴, 자국 이익 우선주의는 지구촌을 죽임의 전쟁터로 만들고 있다. 

우리가 살아 온 이 땅위에도 생명의 위기는 지속되고 있다. 산업화,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라는 평가가 있지만, 안을 돌아보면 권력지상, 시장절대, 금전만능의 가치체계가 주류가 되고, 민주주의의 형해화(形骸化), 빈부의 양극화, 인간성 파괴와 같은 정치사회현상이 만연하다. 한반도의 머리 위로 핵전쟁의 먹구름이 짙어가고, 민족의 허리 위로 분단의 상처는 깊어가고 있다. 지배엘리트​들의 권력투쟁이 공론장을 지배하고, 정치에 대한 혐오를 확산시키며, 패배적 염세주의가 미래세대 청년들을 질식시키고 있다. 

생명 위기의 시대에 <한살림선언>은 사람들의 각성과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생명에 대한 각성, 자연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가 우주의 일원이라는 깨달음과 공생(共生),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적 협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모든 사물과 존재는 서로 연관되고, 상호의존하며 살아가는 하나의 전체이며 동시에 전일적인 생명의 부분들이다. 또한 모든 생명은 하나이므로, 생명의 존엄성은 사람과 하늘, 사물로 확장된다. 이 확장된 생명의 세계관에서 인간중심의 닫힌 사고와 기계적 연술은 비로소 영성의 차원으로 해방되고, 동·식물과 자연만물로 내려와 어울리고 함께한다. 이로써 ‘천지에 시(侍 , 모심)가 아닌 것이 없고’, 인간은 뭇 생명과 더불어 참된 자유를 얻는다.

자유로운 개인들은 평등과 평화, 환대의 공동체를 꿈꾼다. 생명운동은 인간의 자각적, 의식적 활동이다. 부당한 이익을 사양하고 정당한 손해를 즐겁게 수용한다. 나를 낮추고 낮은 곳으로 임하며, 상대를 높이고 모시는 절제와 검박, 자애의 공동체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시대정신이라는) 필연의 공간으로 진입한다. 절제와 검박, 자애를 실천하는 ‘새로운 생활양식’은 자유의 구체적 표현이며, 생명살림의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역사적 실천행위가 된다.

지난 30년 <한살림선언>은 70만 조합원과 2천여 생산자들의 자유선언이자 생명살림의 실천강령이었다. 한살림은 농약과 화학비료로 황폐화된 땅 위에 생명농업의 싹을 틔우고, 각박한 도시 소비자들에게 나눔과 환대의 공동체를 제안하였다. 도시와 농촌, 생산자와 소비자가 둘이 아님을 선언하고,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지키고, 소비자는 생산의 생활을 책임지는 연대와 공생을 실천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서 농민, 농업, 농촌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조금씩 일어나고, 친환경유기농업과 도농직거래, ‘생산과 소비가 하나’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지금 전국 118개 한살림 생산자 공동체와 87개 가공산지에서 친환경유기농산물과 우리 농업의 미래가 만들어지고 있다. 200여 개 도시 한살림매장에는 매일 생산자들의 땀이 베인 농산물과 가공품이 공급되고 하루에만 수만 명이 이를 이용하고 있다. 전국 400여 마을모임과 500여 개의 조합원 소모임에서 옷 되살리기, 병 재사용, 포장쓰레기 줄이기, 기후변화 비상행동, 농지살림, 햇빛발전, 반GMO, 탈핵 운동, 푸드플랜, 친환경 공공급식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 한살림 내외의 조건과 환경은 새로운 도전과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안으로, 변화하는 시대환경과 조합원들의 요구에 조응하는 운동 미션과 비전, 과제를 재정렬하고 생산자와 소비자 조합원, 실무자와 활동가 등 다양한 내부 구성원들의 신뢰와 유기적 연대를 강화해 조직체계의 탄력성과 집중력을 강화해야 한다.
 

밖으로는 한살림 공동체를 둘러싼 시장상황과 농업환경의 변화, 인구 구조와 사회문화의 변동,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 양상을 통찰하고 생명의 가치를 기반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생활 양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나가야 한다.
 

특히, 생산자의 후세대를 키우고 청년과 미래 세대를 한살림으로 모시는 일은 당면한 한살림의 우선 과제이다. 나락 한 알 속에 담긴 우주생명의 가치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살피고 이들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되도록 한살림은 모든 지원을 다해야 할 것이다.
 

30년 전 창업, 창립의 시대가 선언적 가치, 선지자적 실천, 민중적 사업방식으​로 개척되었다면 현재 우리는 성찰적 문제의식, 소통적 실천, 협업적 사업방식으로 낡은 관성, 관습, 관행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시장의 위기가 가져온 저성장, 관념의 탈성장론을 넘어 성장 패러다임 자체의 전환을 기획해야 한다.

한살림에 대한 사회적 역할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다. 조합원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경제, 협동운동의 확산과 활성화를 위해 한살림이 먼저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한살림은 생명살림, 농업살림, 밥상살림의 기치를 들고 북녘동포, 지구촌 민중들과의 연대를 실현해 가야 한다. 장일순 선생도 일찍이 “겸손의 토대 위에서 세상을 넉넉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자, 알뜰함으로 세상의 누구도 굶주리지 않게 하고, 자애 속에서 잘못한 사람조차 안식처를 찾도록 하자는 게 한살림 정신”이라고 설명하고, 이러한 진리를 세상 속에서 펼쳐 나가고자 하는 것이 한살림의 뜻이라고 말했다.
 

모든 진리는 생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한살림선언> 역시 생명의 본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한 살림의 생명선언은 편 가름이 없고 아집이 없으며, 세상 모든 진리들과 동등하게 대화하고 공존할 수 있다. 한살림운동은 이제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이들과 손잡고 ‘세상의 밥이 되는 한살림’으로 나아갈 것이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한살림선언> 30주년을 맞아, 한살림의 뜻을 펴는 길 위에서 먼저 떠난 벗들을 기억한다. 지난 30여 년 동안 수많은 벗들이 생명의 품으로 돌아갔다. 장일순, 박재일로부터 백운장에 이르기까지 한살림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벗들이 티끌과 하나가 되었다. 죽음은 생명의 뒷면이니 생명과 영원히 함께 있다. 먼저 간 벗들과 우리는, 모두를 살리는 한살림과 더불어, 모든 생명과 손잡고 함께 미래로 걸어갈 것이다.



2019년 10월 29일 한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