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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돌아보기 [1] 거돈사지와 홍원창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12-02
첨부파일 흥원창.jpg 조회수 2,321

 원주에서 천년의 시간을 더듬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흥업면 대안3리 대수리 마을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노부부는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해 주는 금장태(76) 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님 부부와 인사를 나눈 뒤 원주 돌아보기에 나섰다. 대수리 마을을 벗어나 대안로를 따라 귀래 방면으로 차머리를 틀었다. 10여 분을 달리다 귀래와 문막 방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다시 귀래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지방도 404호선은 굴곡이 심한데다 대형 덤프와 대형 트럭이 쉴 새 없이 오고가 매우 위험해보였다. 지나는 곳곳에 석산이 흉물스럽게 나그네를 응시한다. 원주공원묘지와 귀운저수지를 오른쪽에 두고, 풀과 이름 모를 꽃들이 반기는 산길을 달렸다.

비어있음의 미학, 폐사지

날은 흐려 있어 덥지 않고 싱그러운 초여름 바람이 차창을 넘어 살포시 살포시 들어온다. 1997년식 뉴코란도는 조심스럽게 귀래면 소재지를 지나 다시 부론 방면 531호 지방도로 갈아타고 목적지인 정산리 거돈사지(居頓寺址)를 향해 나간다. 보물들로 가득한 거돈사지에 도착하니 한적하고 넓은 거돈사 터가 일행을 반긴다. 원공국사탑비부터 돌아보기로 한다. 금 교수님은 열심히 뭔가를 수첩에 적기 시작한다. 평생을 학자로 보내서인지 한글자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

 

보물 제78호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址 圓空國師勝妙塔碑)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는 고려시대 스님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공국사(圓空國師, 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세속에서 쓰던 성은 이 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 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 했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하여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원공국사승묘탑비에 대한 설명 옆에 탑비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거돈사 원공대사 승묘탑비(居頓寺 圓空大師 勝妙塔碑)

대사의 성은 이(李) 씨 이름은 지종(智宗) 자는 신측(神測) 전주(全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행순(行順) 어머니는 김(金) 씨다. 신라 경순왕(敬順王) 4년(930)에 출생하였다. 8세 때에 사나사(舍那寺)의 스님 홍범삼장(弘梵三藏)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나 홍범이 우리나라를 떠났기 때문에 다시 광화사(廣化寺) 경철(景哲) 스님에게서 배우고 고려 정종(定宗) 1년(946) 17세 때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계(戒)를 받고 광종(光宗) 4년(953)에 희양산(曦陽山) 혜초(惠超)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뒤에 승려에게 실시하는 선과(禪科)에 합격하였다. 광종은 중국의 문화를 대량으로 도입하여 모든 제도를 개혁하였는데 그 당시 중국에 유학하는 승려들이 많이 있었다. 대사는 처음에는 유학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으나 증진대사(證眞大師)가 꿈에 나타나 유학을 권하는 바람에 마음을 바꾸어 바다를 건너 오월(吳越)에 들어가서 영명사(永明寺)에 들려 수선사(壽禪師)를 만나고 다​시 국청사(國淸寺)의 정광대사(淨光大師)를 찾아서 대정혜론(大定慧論)과 천태교의(天台敎儀)를 배웠다. 광종 19년(968년)에 승통(僧統) 찬영(贊寧)과 천태현재(天台縣宰) 임식(任埴) 등의 요청에 의하여 그곳 전교원(傳敎院)에서 대정혜론(大定慧論)과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고 광종 21년에 본국에 돌아왔다. 광종은 대사를 맞이하여 금광선원(金光禪院)에 머물게 하고 중대사(重大師)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대사는 경종(景宗)때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성종(成宗)때에 적석사(積石寺)로 옮기고 임금 앞에서 강설을 개진하였다. 목종(穆宗)때에 선사(禪師)에 임명되고 불은사(佛恩寺) 호국사(護國寺) 외제석원(外帝釋院)의 주지(住持)를 동시에 맡았다. 현종(顯宗)은 대사를 대선사(大禪師)에 임명하였고 뒤에 다시 왕사(王師)에 봉하였다. 현종 9년(1018) 4월에 원주 현계산 거돈사(原州 賢溪山 居頓寺)에 은퇴하여 그달 17일에 89세로 입적하였다. 현종은 국사(國師)로 추증하고 시호(諡號)는 원공(圓空) 탑의 명칭은 승묘(勝妙)라 하였다. 대사의 법호(法號)는 여러 번 추가되어 ‘혜월광천편조지각지만원묵적연보화(慧月光天遍照至覺智滿圓黙寂然普化)’라 하였다. 

원비 고려 현종 16년(1025)

글 상서이부낭중 최충(尙書吏部朗中 崔冲)

글씨 예빈승((禮賓丞) 김거웅(金巨雄)

 

탑비의 비 머리는 채석장이 있는 문막읍 비두리 부근에서 정성껏 새겨서 가져온 것이라는데, 한 고승이 홀연히 나타나 소의 혼만 데리고 가서 옮겨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비석 머리가 넘어간 곳이라 해 ‘비두네미’라고 불렸던 것이 지금의 비두리란 마을 이름이 됐다고 한다.

탑비와 함께 세워져 있었다던 승묘탑은 일제강점기에 반출됐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대신 훼손된 부분까지 재현해 놓은 복제품이 거​돈사지 맨 꼭대기에서 지나온 세월을 훓어보듯 빈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거돈사지 삼층석탑(보물 제750호)

거돈사지(居頓寺址)의 뜻이 ‘건방떨지 말고 머리 조아리면서 살아라’는 뜻이 있는 것 같다고 금 교수님께 말씀 드리니, 그보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의 ‘頓’이 아닐까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주신다. 어쩐지 그 말에 더 신뢰가 가는 것 같다. 글자에 머무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다고 하여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란 말도 있지만 나 같은 어리석은 중생은 글자에 집착하는 편이라 그 뜻이 몹시 궁금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원공국사승묘탑비에서 서쪽으로 거돈사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보물 제750호 거돈사지 삼층석탑으로 자리를 옮긴다. 금 교수님께서는 여전히 수첩에 메모하기 바쁘다. 

거돈사지 삼층석탑 앞의 안내판을 보니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만, 돌로 된 축대 안에 흙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5단의 밑받침을 둔 지붕들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이 있고, 그 위에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를 얹어 놓았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기둥 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 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탑 앞에는 배례석(拜禮石 )이 놓여 있다.’고 적혀있다.

삼층석탑 뒤쪽에 있는 금당터(金堂址)로 자리를 옮겨 거대한 불대좌(佛臺坐)와 마주한다. 금당은 부처를 상징하는 불상을 모시는 곳으로 사찰의 ​중심공간이다. 거돈사 금당터에는 전면 6개, 측면 5개의 주춧돌(礎石)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20여 칸의 큰 법당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초석의 배치로 보아 내부는 통층이고, 외부는 2층 규모의 웅장한 금당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당터 중앙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높이 약 2m의 화강석 불대좌(佛臺坐)가 있다.

거돈사지 금당 앞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보면 천 년 전 이곳의 생활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금당에서 부처님께 소원을 비는 사람들과 분주하게 오가는 승려들, 삼층석탑 앞에서 다소곳이 반배를 올리는 백성들, 공양간에서 불을 지피는 행자 승들, 공양주들. 지금, 그 사람들과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잔디와 이름 모를 풀들이 철마다 피어난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하며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맞이했던 노거수(老巨樹)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방문객을 둘러본다.

금당 터 위 강당으로 올라서자 금 교수님의 사모님이 덩실 덩실 춤을 추고, 노 교수는 추임새를 넣는다. 이제 곧 팔순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놀이를 보며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똑같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강당은 사찰에서 경전을 강의하거나 큰 스님이 설법하는 곳으로 강설당(講說堂)이라고도 한다. 고대 사찰에서는 대부분 금당 뒤에 배치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금당 앞에 두었다고 한다. 금당과 달리 자연석 기단을 쌓았다. 금당 뒤편에는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승방터와 우물터가 있다.

비움의 아름다움이 바로 이런 것일까. 금 교수님은 ‘이곳에 오니 비로소 부처님을 만나는 것 같다’며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맨 가장자리에서 옛 절터와 함께 천년을 살아 온 노거수 앞에 서면 그 자태에 숙연해지고 만다. 거돈사의 탄생부터 원공국사의 입적까지, 그리고 모진 풍파를 겪은 고려와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영화와 굴욕과, 전쟁 등을 지켜보았을 느티나무는 지금도 굳건하게 거돈사지와 함께 하고 ​있다. 절집을 세울 당시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 위로 날개 돋듯 하늘을 향한 모습에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돌 사이로 비집고 나온 뿌리로 인해, 돌을 먹고 자란다 하여 ‘돌나무’란 별칭도 있다고.잠시 그곳에 앉아 천 년 전으로 훌쩍 떠나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은섬포(銀蟾浦)의 흥원창(興原倉)

우리 일행을 태운 뉴코란도는 다시 부론면 흥원창(興原倉)으로 향한다. 

정산리를 빠져 나올 때 즈음 정산리의 ‘정’자가 ‘솥정’ 자를 쓰는지 금 교수님이 묻는다. 알지를 못해 ‘잘 모르겠다’고 답한 뒤, 나중에 찾아보니 ‘鼎’자가 맞다. 원주시 지명유래에 따르면 솔미 남동쪽 강어귀에 앙성면 강천리로 가는 나루터를 배경으로 솔미산 밑에 발달된 마을을 말한다. 솔미산 밑에 있으므로 솔미라고 했는데, 이곳 부근의 산 모양이 가마솥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정산리라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담안’이라는 마을도 있는데, 거돈사가 없어진 후 옛날 거돈사의 담 안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서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거돈사지에서 지방도 531호선까지 나와 부론방면으로 차머리를 틀면 곧바로 자작고개가 나온다. 계속해서 부론면소재지 방면으로 가다 원주금융회계고등학교를 오른쪽에 두고 직진하면 비로소 흥원창과 만날 수 있다. 흥원창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원주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인 두산백과에 따르면 흥원창은 고려 13개 조창의 하나로 원주(原州) 은섬포(銀蟾浦)에 있었다. 이러한 전국적인 조운체제(漕運體制)가 정비된 것은 992년(성종 11)경으로, 조창에서는 전년에 거두어 저장한 세미(稅米)를 이듬해 2월부터 4월까지 경창으로 운송하였는데, 흥원창에는 세미의 운송을 위하여 2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 21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 판관(判官)이 파견되어 창고와 운송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중앙에서는 감창사를 파견하여 때때로 발생하는 세미의 횡령과 기타 부정행위를 조사 ·감독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나, 후기에는 관선조운(官船漕運)이 쇠퇴하고 사선업자에 의한 임운(賃運)이 행해지면서 그 기능은 쇠퇴했다. 강원도에는 소양강창과 흥원창이 있었고, 충주의 가흥창, 밀양의 삼랑창, 창원의 마산창, 진주의 가산창, 나주의 영산창, 영광의 법성포창, 익산의 덕성창, 아산의 공진창, 한성의 경창, 배천의 금곡포창, 강음의 조읍포창이 있었다.

흥원창은 고려말부터 정비되었는데 좌수참(左水站)에 소속되어 있었다. 

흥원창은 강원도 지역의 조세를 주로 저장하였는데 성종 이전까지는 조세 수합 지역이 강원도의 원주·평창·영월·정선·횡성 지역보다 더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예종이 등극하자 강원도관찰사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어 있는 조운제도가 현실과 다르게 집행되고 있음을 상소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종 때까지 흥원창에 조세를 납입한 곳은 원주를 비롯하여 횡성·영월·평창·정선·강릉·삼척·울진·평해 등 8 개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강릉·삼척·울진·평해 등 동해안에 위치해 있는 4 개 지역이 육로를 통해 원주의 흥원창으로 조세를 수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흥원창이 조세를 수납하는 지역은 13,839 결 가운데 3,690 석의 조세를 거두어 전국에서 내는 조세 부담액의 약 1.1%를 차지하였다. (출처 : 강석오, 「고려시대 조운제도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지금의 흥원창 자리가 과거 부론면소재지였지만 대홍수로 인해 현재 면소재지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지금은 섬강자전거길이 시원하게 뚫려 있지만 과거 흙길이었을 때만큼 운치가 있지는 않다. 다만,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빼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섬강이 끝나는 지점의 기암절벽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계속)

 



글 원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