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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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스토리그래픽_13.png | 조회수 | 3,406 |
지역개발 사업과 주민조직 운동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을 중심으로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의 만남 1965년 3월 22일, 천주교 춘천교구가 분리되어 원주교구가 설정되고, 이 해 6월 29일, 초대 교구장에 지학순 다니엘 주교가 취임하자 당시 원동 성당의 교우였던 장일순 선생과 사목자(司牧者)와 평신도(平信徒)로서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뤄진다. 이후 두 분은 평생(平生)을 정신적 반 려자(伴侶者)로써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이 두 분의 삶을 연보(年譜)를 통해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지학순 다니엘 주교의 생애 지학순(池學淳) 주교는 1921년 9월 9일 평안도 중화군 중화면 청학동에서 아버지 지태린과 어머니 김태길의 자녀 6남매 중 넷째 2남으로 태어났다. 14세에 세례(세례명:예언자 다니엘)를 받고 1936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내 소(小)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1940년 8월 폐결핵으로 중퇴했다. 몇 년 동안 치료를 한 후 1943년 3월 함경남도 원산의 덕원신학교에 편입했다. 하지만 북한의 공산정권에 의해 학교가 폐쇄됨에 따라 학업을 중단하고 남한으로 탈출하다 체포돼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1월 17일 윤공희 부제(광주대교구 은퇴 대주교)와 월남에 성공, 서울 성신대학에 편입했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국군에 지원 입대해 전투에 참가, 북진하는 도중에 고향을 찾았으나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풍비박산 나고 없었다. 1952년 2월 횡성전투에서 부상해 후송된 후 제대하였는데, 이 때 육군병원에서 우연히 동생 지학삼을 만나기도 했다. 제대 후 다시 복학하여 1952년 12월 15일 부산에서 노기남 주교에게 신품을 받았다. 신품을 받은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전교하였으며, 후에 청주교구에서 여러 해 사목활동을 하였고, 1956년 로마 울바노 대학에 유학해 1959년 동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서울 가톨릭대학에서 교회법을 강의하였고, 1962년 부산 초장동교회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1962년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쳐, 한국 교회는 쇄신과 사회적 적응을 위해 본격적인 노력을 전개하게 되었고, 교황 바오로 6세 성하는 한국 교회가 날로 크게 발전하고 있음을 알고, 1965년 3월 22일 춘천교구를 분리, 원주교구를 설정(교황청령 2196-66)하고, 초대 교구장에 지학순 신부를 임명했다. 그해 6월 29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교황공사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의 주례와 춘천 교구장 구 인란주교, 부산 교구장 최재선 주교의 공축에 의해 주교에 성성되고 원주교구장에 착좌했다. 원주교구는 한국 교회의 15번째(남한에 11교구)의 교구가 되었으며, 사목관할 구역은 강원도의 원주시, 원성, 영월, 삼척, 정선, 경북의 울진군으로, 면적 5,805㎢에 총 인구수 722,349명이고, 신자 수는 13,390명에 본당 수는 13개였으며 소속 신부는 방인사제 9명과 외국인 사제(골롬반회 소속) 11명이었다. 원주교구는 교통이 불편한 산악지대와 경제적으로 낙후된 소도시, 농촌, 어촌, 광산촌을 포함하는 우리나라 교구 중 가장 교세가 약한 ‘취약한 교구’로 출발하게 되었다. 지 주교는 지역 주민의 복음화를 위해 교회를 중심으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으며, 1967년 8월 교육 사업에 착수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육민관 중학교를 인수하여, 진광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참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학교법인 진광학원은 1973년 3월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지 주교는 1969년 10월, 진광중학교 내에 학생들에게 협동교육을 실시하고 강원도 지역사회개발에 기여하고자 ‘협동교육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학교신협인 진광신협을 창립했다. 또한 시골의 학생들을 위해 원주시 내에 가톨릭 기숙사를 운영해 오던 중 1973년 이를 교육원으로 변경해 신앙 교육과 일반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968년 원주에, 1978년 제천에 각각 가톨릭센터를 개관해 종교의 생활화 운동 센터로써, 또 시민들에게 가톨릭 문화를 보급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휴식과 만남과 나눔의 공간으로 이용하도록 개방, 지역사회개발과 문화 향상에 공헌하게 하였다.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는 사목지표 아래 전개한 신앙의 생활화 운동을 통하여, 각 본당의 지도자를 교육시켜 사목위원회를 조직, 본당 운영의 자립에 큰 역할을 하게 하였다. 매스콤의 사회적 역할이 지대함을 인식하고, 1970년 7월 9일 5·16 재단과 합작으로 원주 가톨릭센터 내에 원주 MBC를 설립, 9월 19일 개국하여 원주와 인근 지역의 언론과 문화발전에 기여하였으며, 동년 10월 원주에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로 하여금 성 바오로 병원을 개설, 1985년 폐쇄할 때까지 반 무료로 환자를 치료하도록 하였다. 1971년 10월 5일은 한국 천주교회가 그 면모를 일신하게 된 역사적인 날인데, 그 계기는 앞서 말한 원주문화방송이 원주교구가 5·16재단과 60대 40의 비율로 공동 투자하여 설립한 것이나, 1971년 3월에 운영 실태를 감사한 결과 세금조차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사 운영에도 부정이 드러나 교구는 그 운영을 맡고 있는 5·16재단에 수차 시정을 요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권력을 내세워 교회의 요구를 무시하여,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 대표는 연석회의를 열고 제도화된 부정부패와 근본적인 불의에 도전하기로 결정을 보아, 원주 원동성당에서 교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약 1,500여 명이 모여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를 갖고, 교구 사제단과 함께 앞장서 ‘부정부패 뿌리 뽑자’, ‘사회정의 이룩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지 주교가 앞장선 이 대열은 경찰의 제지를 받아 성당 마당에서 그 날 밤을 새우며 이 땅에 가득한 부정과 부패와 불의가 가시고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되기를 기도하였다. 이 시위와 농성은 사흘 만에 끝났는데, 이 사건은 교회 안팎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켰고 경향 각지에서, 또 종파를 초월하여 부정부패 추방운동을 지지하는 성명과 시위를 벌였다. 지학순 주교는 18일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불의한 세력과 싸우는데 신명을 걸었으며, 우리 교회는 단합해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할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 천주교 주교단을 11월 4일 평신도의 날을 맞이하여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공동 교서를 발표하여 ‘교회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대변자’로서 ‘공동선과 인간 존엄성 회복’에 앞장 설 것임을 다짐했다. 사회는 보수적이며 소극적인 천주교의 이러한 변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따라서 원주교구는 일약 사회정의평화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지학순 주교의 가난한 자와 노동자, 농민을 위한 대 사회적 정치적 투쟁은 투옥되면서까지 계속됐다. 1972년 8월 제천에 있는 한국 천주교 유적지의 하나인 배론을 성지로 개발하기 위한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일선 사목에서 은퇴한 서울대교구 소속 양기섭(베드로) 신부로 하여금 황무지였던 배론의 성역화 사업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이해 8월 19일 남한강 유역에 내린 250mm 집중 폭우로 대홍수가 일어나, 교구 관내 9개 시·군과 인근 4개 시·군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수재민 145,000명, 농경지 19,645정보, 가옥 22,967동, 공공시설 44억 원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지학순 주교는 이 사실을 즉각 세계 원조기관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국제 까리따스와 독일의 미제레올이라는 두 원조 단체의 도움을 얻게 되었고, 지 주교는 동년 10월 초에 두 단체를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정부의 비상 계엄령 선포로 연금당하여 출국이 늦어져 12월 초에 원조문제에 대한 최종 협의를 보게 되었다. 1973년 1월 ‘천주교 원주교구 재해대책사업위원회’가 행정부, 학계, 언론계, 종교계 대표로 구성됨으로써 종래의 교회 원조사업이 아닌 지역사회개발사업으로 차원을 높이게 되었다. 이 재해대책사업은 4단계로 추진되었는데 1단계 긴급 구호사업, 2단계 전답 복구사업, 3단계 부락 개발사업, 4단계 지역 개발사업으로 구분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우선적으로 재해민들을 지원하였으나 무조건적인 구호가 아니라 노력에 대한 대가로써 지원되었고, 또 경제적 지원도 무상이 아닌 연차적 상환의 방법을 택하는 등 종래의 무조건적 구호사업을 통한 의타심 조장의 방법을 지양하고자 하였고, 또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계기와 자존심을 잃지 않도록, 물질적 지원에 앞서 교육을 통해 상호 협동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의식을 개발하였다. 이 같은 교육의 결과는 협동심을 일깨웠으며, 많은 농민과 광산 근로자가 갖고 있는 잠재적 능력 개발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많은 농촌과 광산촌에 협동적 작목반, 신용협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이라는 결실을 맺었으며, 그 중에는 현재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유수한 지도자와 조합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사업을 통한 농민과 광부의 의식 계발은 당시 유신독재정권으로서는 눈의 가시였고, 또 지 주교의 끊임없는 정의실천 운동은 정부의 미움을 샀다.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1, 2, 3호가 선포되었고, 4월에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면서 소위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지명 수배하게 되었고, 4월 25일 김지하 시인이 체포됐다. 4월 대만에서 있던 주교회의와 구라파 순방차 출국했던 지 주교는 7월 6일 항공기(CPA450)편으로 귀국 후 김포공항에서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이는 소위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된 젊은이들에게 금품을 주었다는 명분으로 구속 기소되었는데 지 주교는 7월 23일 “유신 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며, 공판을 위해 비상 보통군법회의에 출두할 수 없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사건은 교회 내외에 많은 파문을 일으켜, 전국 각처에서 기도회가 개최되고 9월 23일 원주 원동 주교좌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조직되고, 젊은 사제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정의구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었던 지 주교는 1975년 2월 17일 석방되어, 10개월 만에 원주교구로 복귀하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7, 8, 9호를 계속 발동하여 독재정치를 더욱 강화하던 때이다. 이러한 지 주교와 원주교구의 대사회적 참여와 수난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1976년 1월23일, 교회 일치주간을 맞아 원주 원동성당에서 개최된 천주교·개신교 합동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에서 ‘원주선언’이라는 선언문을 발표(이 ‘원주선언’은 함석헌, 문익환, 서남동과 문동환, 조화순 목사, 함세웅, 김택암 신부 등 개신교계와 가톨릭계의 지도자 등이 참여한 그리스도교 일치주간 미사에서 발표하였다)하고, 이어 3월 1일, 3·1절을 맞아 명동성당에서 있던 민주구국선언사건 소위 ‘3·1절 명동사건’으로 교구 소속 신현봉 신부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었는데, 죄목은 정권탈취를 위한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것이었다. 1982년 4월 5일 교구 소속 최기식 신부가 소위 3월에 있었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을 은닉했다는 혐의로 연행되어 4월 8일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지 주교의 1970년대 부정부패추방운동, 정의사회구현 운동은 건강이 악화되는 80년대 초까지 근 10여 년 지속되었다. 건강 악화로 대사회적 활동에 전념하기 어려워진 지 주교는 교구 내의 여러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발전시켜 나갔다. 진광학교 시설을 확충하여 1987년 12월 30일에 중·고교의 교실을 증축하고 체육관, 도서관 등을 낙성함으로써 학교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1982년 1월 9일 독일인 하이디 수녀로 하여금 가톨릭 의원을 개설하도록 하여 결핵퇴치 사업에 전념하게 하였던 바 이는 오늘의 가톨릭 병원으로 발전하게 되는 한편, 1983년 9월 11일 하이디 수녀에 의해 프란치스꼬 전교봉사수녀회의 설립을 주도하도록 하여 이 수녀회가 1984년 원주 단계동에 병들고 오갈 데 없는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는 노인 요양시설 ‘사랑의 집’을 개원하였다. 교구청의 기구를 확대하여 사회선교국을 신설,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사회사업을 전개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88년 6월 7일 사회복지법인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를 설립, 인가 받아 원주 봉산동에 장애인 수용시설 ‘천사들의 집’, 중증요양원, 종합사회복지관 등의 시설을 개설 하였으며, 교구 내 제천, 사북, 고한, 태백 등의 여러 곳에 양로원, 무의탁 청소년 보호시설, 무료 급식소 등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1985년 9월 20일~23일까지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사업에 참가하여 평양을 방문했을 때 누이동생 ‘용화’와의 상봉은 한 마디로 슬프고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것은 보고 싶었던 형제, 자매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별의 슬픔만이 아니라, 고향은 옛 고향이 아니었고 더욱이 어려서 함께 손잡고 성당에 다니던 사랑하는 누이동생의 ‘천국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지금 천국에 살고 있다’는 말에 받은 충격은 너무 큰 것이었다. 이같은 충격은 오랜 지병인 당뇨병을 더욱 악화시켜,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거처를 농촌 본당인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소재 용소막 성당 경내에 새로 마련하고 요양에 힘쓰는 한편, 교구장직 수행을 위해 매일 원주의 교구청으로 출퇴근 해야 했다. 1990년 11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지 주교의 병세를 감안하시어 교구의 모든 업무를 총대리(總代理)할 수 있도록 김지석 신부를 교구장 계승권(繼承權)을 지닌 부주교(副主敎)에 임명해 주셨다. 지 주교는 요양 중에도 남북 장애인 걷기대회 본부장을 맡아 이 일을 주도하기도 하였으나, 지병이 더욱 악화되어 1991년 12월 18일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하여 2개월 여의 투병 생활을 한 후 다소 호전되어 원주 주교관으로 퇴원하였으나, 이곳의 시설 미비로 치료에 어려움이 많아 3월 6일 강남 성모병원에 재입원하였다. 병세가 상당히 호전되어 4월 15일 퇴원, 원주 기독병원으로 1주일에 세 번씩 통원 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중, 7월 23일 심한 호흡기 장애를 일으켜 중환자실에 입원 치료를 받은 후 8월 4일 강남 성모병원으로 옮겨 재입원하였다. 그러나 1993년 3월 12일 0시 40분경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하셨다. 향년 72세. 동년 3월 16일 오전 10시 원주교구 주교좌 원동성당에서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는데, 영결 미사는 김수환 추기경, 주교회의 의장 김남수 주교, 교황대사 불라이티스 대주교, 윤공희 대주교, 이문희 대주교를 비롯한 한국 주교단과 원주교구 사제단을 포함한 1백여 명이 공동 집전했다. 장지인 제천 배론 성지에서 오후 1시 40분경부터 김지석 주교의 주례로 하관예절이 거행됨으로써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생애 장일순(張壹淳) 선생은 1928년 10월 16일(음력 9월 3일)에 원주시 평원동 406번지에서 장복흥과 김복희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40년 원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요한이라는 세례명(洗禮名)으로 영세를 받았다. 1940년에 서울에 유학하여 5년제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서울공업전문대에 입학하였으나,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소위 국대안)의 반대 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을 당했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학업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와 군속으로 군에 입대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1952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죽을 때까지 원주를 떠나지 않았다. 원주로 돌아 온 그는 1948년에 설립된 성육(聖育)고등공민학교에 합류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이 학교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1953년 8월 27일, 장윤, 김재옥, 한영희 등과 함께 이 학교를 인수하고, 동년 9월 5일,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5년 3월 24일, 김재옥, 김종호, 이종덕, 장윤, 한영희 등과 함께 학교법인 대성학원(大成學園)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 학교의 교명을 대성고등공민학교라 칭하였는데, 초대 교장은 장윤 선생이다. 장일순은 20대에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윈 월드 운동’에 참가하였다. 장일순은 1958년 3월 23일, 학교법인 대성학원 초대 이사장을 사임하고 이 해 5월에 실시된 4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60년 7월에 실시한 5대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으로 출마하였으나 조직적인 부정 선거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이 무렵 나이 어린 김영일(시인 김지하)을 만나 죽기까지 서로 배우며 일깨우는 관계를 계속했다. 장일순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이틀 뒤 그가 평소 주창하던 ‘중립화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8년 언도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와 춘천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을 하였다. 출소한 후 다시 대성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6개월 만에 전국 최초로 고등학생이 일으킨 대성학교 학생들의 ‘한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직위를 박탈당했다. 1963년 출옥 이후 1969년까지 사회안전법에 묶여 모든 활동에 철저한 감시를 받아 포도농사와 어려서 할아버지 장경호에게서 배운 붓글씨와 서화를 익히는 한편, 당대 유학의 대가인 차강(此江) 박기정 선생의 지도를 받은 바 있는 서도(書道)에 전념하는 은둔생활을 했다. 1965년 6월 29일, 천주교 춘천교구가 분리되어 원주교구가 설정되어 초대 교구장에 지학순 다니엘 주교가 취임하였고, 천주교 신자인 장일순 요한은 자연스럽게 지 주교와의 만남을 통해 그가 평소에 가져 온 자신의 사상을 후학들을 통해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천주교회가 실현하고자하는 진광학교 설립과 재해대책사업위원회 구성을 통한 재해민 구호, 농민과 어부, 광산촌의 광부들의 의식화 교육에 일조를 하는 한편 민중들에게 협동적 삶을 살도록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 지도자들에게 운동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또 신용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 한살림운동, 환경운동을 전국적으로 보급함에 있어 정신적 뒷받침을 하는데 온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시인 김지하, 한살림운동 박재일, 민족통일운동 이창복 등 민주화 투쟁을 위해 각 분야에서 활동해온 수많은 이들에게 그의 호인 무위당에 표현됨과 같이 무위사상(無爲思想)을 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면서 이들 모든 운동을 생명운동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그의 호를 일속자(一粟子)라 하여 자신을 작은 좁쌀 알에 비유하여 스스로를 낮추고자 하였다. 한편 운곡 원천석선생 시비, 해월 최시형 선생 추모비(모든 이웃의 벗 崔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 한국천주교배론성지 등 우리들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기리는 비문과 표지석을 쓰기도 하였고, 그 어려운 독재 시절에 민주화 투쟁과 생명운동을 위한 활동에 도움을 주고자 글씨와 난초를 쳐주기도 하였으며, 또한 이들의 활동기금을 마련해 주기 위해 5회에 거쳐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일순 선생은 1983년, 민주세력을 결집시켜 통일운동을 전개시키고자 ‘민족통일국민연합’ 발족에 일조하였으며, 1991년,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 발족에 고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91년 6월 14일, 원주기독병원에서 위암으로 수술을 받아 치료하는 중에 1992년 5월 11일, 두 차례에 걸쳐 생명사상을 주제로 하는 강연을 하였는데 이 같은 대중연설은 칩거생활 30여 년 만에 처음이다. 그리고 1993년, 노자(老子)의 도덕경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풀이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이현주 목사의 도움으로 펴낸바 이 또한 최초의 저술이다. 이해 9월, 병세가 악화되어 재입원하여 투병하던 중 11월 13일,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로부터 투옥 인사들의 인권보호와 석방을 위해 애쓴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으며, 자신보다 1년 먼저 선종(善終)한 평생의 동지였던 지학순 주교의 정신을 잇기 위한 ‘지학순주교기념사업회(현 지학순 정의평화기금)’ 결성을 병상에서 독려하던 중 1994년 5월 22일, 봉산동 자택에서 향년 67세에 영면하여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강연 정인재 전 (사)무위당사람들 이사장 정리 원주에 사는 즐거움 편집팀 사진 원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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