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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 이야기 [1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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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가르치지 않는 스승,

무위당


〈 다음의 글은 『무위당사람들 소식지』 2019년 12월 69호 pp.52-57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

지난 10월 11일, 원주시립중앙박물관에서 무위당학교와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의 주최로 생명사상포럼이 열렸습니다. <근대한국의 생명사상을 찾아서 : 다석 유영모, 씨 함석헌 그리고 무위당 장일순>이라는 주제로 마련된 이번 포럼은 한국 근대철학을 대표하는 세 거목의 생애와 사상을 때로는 깊이 있고 때로는 새롭게 해석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가운데 기조강연으로 참석하신 전호근 경희대학교 교수님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위원회​

노자가 이르길 “성인은 무위에 머물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베푼다(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했다. 또 “참으로 아는 이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이는 참으로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고도 했다. 노자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 물어보는 제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같은 말을 공자도 했다. 어느 날 공자가 “나는 말이 없기를 바란다”고 하자, 자공이 여쭈었다. “선생께서 만약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저희가 어떻게 선생님의 가르침을 전하겠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연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계절이 갈마들고 만물이 자라나는데 자연이 무슨 말을 하던가(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 生焉 天何言哉)?”

또 이런 말도 했다.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하지만 훌륭한 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훌륭한 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子曰 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


노자는 제자가 없어서 함께 대화할 사람이 없었지만 공자는 제자가 많았기에 질문을 거쳐 한 마디 더 얻어 들을 수 있다. 공자는 제자 자공이 어떻게 가르침을 전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자연은 말이 없지 않느냐는 말로 대답했다. 그렇다. 자연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연에서 배운다. 
말없는 자연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배우듯 사람에게 배울 수 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는가.
원주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다.​ 선생은 무위와 말없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던 철학자다. 선생은 스스로 자신의 글을 책으로 엮은 적도 없고 높은 벼슬을 한 적도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지도자로 행세하지도 않았다. 삶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선생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잊지 못하고 있다. 선생이 남긴 의인란(擬人蘭) 화제(畵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마라.

앉은 자리에서 선 자리를 보라

이루려 하면은 헛되느니라

자연은 이루려 하는 자와

함께하지 않느니라

 

척 보아도 노자의 무위자연을 풀이하여 작품으로 썼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선생은 나서서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에게 “엎드려!”와 “기어!”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물러남을 중시한 노자의 철학과 꼭 닮았다. 또 선생은 아무리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똑 같은 인간으로 대했다는 점에서 한 사람의 가치가 천하와 맞먹는다고 이야기한 맹자의 정의론과도 상통한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삶과 사유에는 놀랍게도 1,300년 한국철학사가 압축되어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 의상의 화엄철학, 이황의 수양론, 최시형의 동학사상…. 그는 정의도 하나의 주장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 화쟁이 이보다 철저할 수 없고, 스스로 일속자로 자호하여 전체의 가치를 하나 위에 두지 않았으니 화엄의 종지를 다른 데서 찾을 것 없다.
원주에서 밥집을 운영하는 생활인 이영순은 “선생님은 말과 행실이 일치했어요. 그래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러니 퇴계 이황이 살아오면 가장 먼저 반길 사람이다. 
그러니 선생의 삶과 죽음이 모두 말하지 않는 가르침이요, 무위행의 실천이었다 하겠다.

선생의 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좁쌀 철학이다. 선생은 좁쌀 한 알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고 자주 이야기했는데, 이런 사유는 ‘하나가 곧 전체’라는 화엄 불교의 세계관과 일치할 뿐 아니라 밥 한 그릇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고 한 최시형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생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할 것인가? 말로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그의 가르침을 잊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선생께서 가신 지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선생의 삶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아마 기억날 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바둑기사가 자신이 둔 수를 정확하게 기억​해내 복기할 수 있는 까닭은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반드시 그렇게 두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마구잡이로 산 사람은 자신의 삶을 기억해낼 수 없고 그런 까닭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도 없다. 흔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엮으면 소설 몇 권은 너끈히 나올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함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흔하지만 참으로 잊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할 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돌아볼 만한 과거가 없다는 것, 기억할 만한 순간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런데 무위당 선생의 삶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선생께서 원주역에서 혼수 돈을 소매치기 당한 아주머니를 도와준 이야기를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무위당 선생을 굵직한 목소리에 커다란 체구를 지닌 무인의 풍모라고 멋대로 상상한 적이 있다. 역 앞에서 한번 큰 소리로 외치면 건달도 소매치기도 모두 꼬리를 내리고 벌벌 떠는 그런 위풍당당한 모습 말이다. 하지만 선생께서는 그런 인물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선생은 원주역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힘으로 도둑을 제압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딱한 사정을 듣고 역 대합실에 앉아 계셨을 뿐이었다. 그리고 도리어 소매치기에게 자신을 낮추고 미안해했다. 도둑과 이야기하려면 스스로 도둑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도둑을 만나면 도둑이 돼서 얘기를 나눠야 해요. 도둑은 절대 샌님 말을 안 들어요.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도둑이다 싶으면 그때부터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이 말이에요. 그때 도둑질을 하려면 없는 사람 것 한두 푼 훔치려 하지 말고 있는 사람 것 털고 그것도 없는 사람과 나눠 쓰면 좋지 않겠느냐고 하면 알아들어요. 부처님은 마흔네 개의 얼굴을 갖고 계시다는 말이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이 말이에요.”

 

‘도둑을 만나면 도둑이 돼서 이야기를 해야 통한다’,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이 말은 마치 장자가 ‘나비 꿈’ 이야기에서 말한 ‘물화(物化)’를 연상시킨다. 물화는 ‘여물동화(​與物同化)’의 줄임말로 내가 상대와 일체가 된다는 뜻인데 내가 주체고 상대가 대상이라는 인식을 넘어선 결과다. 내가 온전히 상대와 같아지려면 나의 처지를 버릴 수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나를 버려서 상대를 이루는 것, 그것이 장자의 물화(物化) 개념에 가깝다. 유가의 수양론이 ‘성기성물(成己成物)’, 나를 이룸으로써 남을 이루어주는 것이라면, 장자의 양생론은 나를 내려놓고 상대를 이루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대가 도둑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보통 도둑을 만나면 욕밖에 안 하니까 그 사람에게 도둑은 도둑으로만 남는다. 도둑을 무위당 선생처럼 대하면 더 이상 도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도둑을 도둑 아닌 사람으로 만드는 게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자꾸 ‘도둑놈’이라 하고 ‘범죄자’라 욕하니 도둑이 끝내 도둑으로만 남는 것이다. 아무리 도둑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도둑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도둑이 아니다. 소매치기를 만나 돈을 돌려주게 한 일도 이런 마음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원주에서 합기도장을 운영하는 이가 관원을 모으지 못해 곤경에 처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자, 어떤 사람이 선생을 찾아가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조언했다. 그가 찾아오자 선생은 이야기를 다 듣고 돌아가 기다리시라고 했단다. 선생은 어떤 방법으로 그를 도우셨을까? 선생은 돈이나 힘으로 사람을 돕지 않았다. 우리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기껏 돈을 모을 궁리부터 한다. 

하지만 본래 힘없는 사람은 힘으로 돕지 않고 돈 없는 사람은 돈으로 돕지 않는다 하지 않았던가. 선생은 소매치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음날 합기도장에 나가 도복을 입고 앉아 계셨을 뿐이었다. 그러니 평소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고 하신 말씀 그대로다. 선생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남을 돕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80년대 어느 날 민주화 운동을 하던 모 인사가 원주로 피신했다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찾아뵈었다. 이야기를 나눈 뒤 작별인사를 드리자 선생은 당신이 피우다 남은 담배 한 갑을 주어서 보냈다 한다. 잠시 후 선생이 뜰 앞 풀밭을 뒤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제자가 “선생님 뭐하세요?” 했더니 “응. 꽁초가 있나 싶어서” 그러곤 꽁초를 찾아서 피웠다 한다. 이를테면 선생은 이런 식이다. 담배는 

몸에 해로우니 끊으라는 말을 하지 않고 말없이 자신이 가진 것을 내주는 것이다. 건강과 행복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요즘 선생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없어서 아쉽다.

내가 무위당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건 돌아가신 지 10여 년이 지난 뒤의 일로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책 「좁쌀 한 알 장일순」을 통해서였다. 거​기에 실린 글에서 선생은 군고구마 장수의 큰 기술(大巧)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다.

작가 홍승연씨가 책에서 전하는 선생의 말씀은 이렇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

그게 진짜야.
그 절박함에 비하면 내 글씨는 장난이지. 못 미쳐.”

 

이 글과 함께 앞 쪽에는

‘백교백성 불여일졸(百巧百成 不如一拙)’이라는 선생께서 쓰신 글씨가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백가지 재주와 성공이 한 가지 졸렬함만 못하다는 뜻인데 「노자」 제45장의 ‘대성약결(大成若缺 : 큰 성취는 모자란 듯함)’과 대교약졸(大巧若拙 : 큰 기술은 졸렬한 듯함)을 하나로 엮어 만든 문장이다. 위의 일화와 함께 이 글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머리에 쥐날만큼 알 듯 모를 듯한 「노자」의 글귀를 누가 이처럼 정곡을 콕 찔러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군고구마 장수만이 지니고 있을 절박한 삶의 문법을 간취하여 풀이한 「노자」의 한 구절이라니. 이와 비슷한 충격은 훨씬 오래 전 다석 유영모의 「노자」 번역본 「늙은이」를 앞에 두었을 때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유영모는 ‘노자’를 ‘늙은이’로 번역했다. 노자는 고유명사 아니었나? 그렇다. 하지만 그 고유명사마저 우리말로 번역해버린 통쾌함이란. 성도 이름도 출처도 불확실한 노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동일한 시공간 속에 늙은이로 환생한 듯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그런 통쾌함은 또 다른 한사람의 늙은이(老子)에게서도 발견된다. 바로 씨 함석헌이다. 그는 YMCA 연경반에서 「노자」 강의를 시작하면서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기어코 「노자」를 읽는다”고 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군사독재 치하가 아니던가? 함석헌은 「노자」를 읽으면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씨 의 힘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다석 유영모, 씨알 함석헌, 무위당 장일순 이 세 분의 ‘노자 선생’님을 만났다. 세 분 선생의 「노자」 읽기는 같은 시대 식자연하는 지식인들의 「노자」 읽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흔히 「노자」류의 고전을 인용하거나 읽는 몇 부류의 이상한 방식은 이렇다.

첫째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며 ‘악법도 법’이라​는 방식으로 왜곡하는 유형이다. 고전을 이보다 

더 나쁘게 읽을 수 없다는 악의적 인용의 전형으로 꼽을 만하다. 그들에게는 악법이 악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위한 아주 좋은 수단으로 고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하기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불온서적으로 분류되는 시대였음을 감안한다면 그런 방식으로라도 읽는 것이 그나마 나은 것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둘째, 너희들의 삶은 잘못되었으니 이처럼 비범한 말을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라는 식의 일방적 훈계로 일관된 고전 읽기이다. 이처럼 권위적 방식의 고전 읽기는 우리의 일상을 얕보는 천박한 사고를 부추긴다. 그들에게 지친 이웃들의 고단한 삶은 비웃음이나 회피의 대상일 뿐이다.

셋째, 짐짓 무소유를 말하면서 사실은 소유의 극을 누리는 자들이 자기모순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읽는 고전이다. 이들이 ‘이미 경제적으로 무소유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무소유의 삶’은 허위를 진실이라고 강변하는 억지일 뿐이다.

세 분 선생은 이들과는 달랐다. 그들의 고전은「성서」와 「노자」, 「논어」와 「불경」이 함께 어울려 있었지만 이야기는 결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무위당 선생은 군고구마 장수의 삶을 낮추어 보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본보기로 삼을 정도로 공경하셨다. 심지어 원주역에서 시골 아낙네의 혼수 돈을 훔친 소매치기의 삶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미안해하셨다. 도둑의 삶도 존중한 것이다.

한 번은 양승학이란 분이 가훈을 써서 선생께 보여드렸다 한다. 가훈의 내용인즉 “즐거운 마음으로 슬기롭게 강하게 살자” 였다고 한다.

선생은 그 글을 보시더니 대뜸 “강한 것은 좋지 않아. 모두가 강해지려고 세상이 온통 난리가 아닌가? 정말로 강한 것은 부드럽고 착한 것이야. 봄볕이 얼음을 녹이는 이치와 같은 것이지. ‘착하게 살자’로 해봐.” 라고 하셨단다. 「노자」 제36장의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굳센 것을 이긴다 (柔弱勝剛强)”는 글귀가 일상 속에서 봄볕으로 빛나는 순간이다.

선생은 늘 이런 식이다. 절대 고전을 들이대며 너 이거 알아? 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곁에 머물면 고전의 향기가 절로 난다.
「논어」에는 어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오는데 그 중에 이런 글귀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히 제자리​에 머문다. 지혜로운 사람은 삶을 즐기며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맨 마지막의 ‘인자수(仁者壽)’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진 사람이 오래 산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소득이 높은 쪽이 오래 산다는 가슴 서늘한 통계는 보았어도 어진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은 증거는 커녕 들어본 적도 없다. 줄잡아 3년 정도는 이 구절을 가지고 고민했으리라.
그러던 것이 어느 날 「노자」 제33장을 읽다가 이 구절과 마주쳤다.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다(死而不忘者壽).”

 

이 구절을 읽는 순간에야 비로소 ‘인자수(仁者壽)’의 뜻을 알았다. 아하! 실제로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잊히지 않는 것을 ‘수(壽)’라 했구나! 그러면 그렇지, 공자가 어진 사람이 육체적으로 오래 산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했을 리가 있나. 결국 사람이 죽지 않고 산다는 건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죽지 않고 산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인자수’가 완전하게 이해된다.

하지만 그렇게 뜻을 알고 나서도 실제로 그런 깨우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얼마전 새로 간행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를 펼쳤더니 해당부분이 이렇게 풀이되어 있었다.

“오래 산다는 말은 육신을 두고 한 말이 아니지. 영원의 자리에 있는 사람한테는 육체의 삶이라는 게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이거든. 생사가 모두 한 바탕 꿈인지라.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오래 산다는 것’은 영원한 삶을 말하는 거지.”

선생은 “소리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 가는 꽃을 보고 부끄러웠다”고 하셨는데 나는 선생의 글을 읽고 있으면 부끄럽다. 동양고전 연구자로 고전의 글귀들을 줄줄이 외면서 뽐내지만 막상 그 글귀와 꼭 맞는 행실을 찾아보기 어려우니 고전 이야기를 하면서 꺼내 놓을 이야깃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도 인용할 수 있는 선생의 삶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온존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 아닌가. 지금 책꽂이에는 「노자」와 함께 장일순 선생을 그리는 세 권의 책이 나란히 꽂혀 있다. 「노자」를 한 구절 한 구절 읽을 때마다 선생의 일화가 살아 움직이는 주석이 되기 때문이다.

‘한 알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본다’는 말이나 ‘사람의 인격은 죽어서도 계속된다’는 말은 참으로 선생의 경우에 꼭 맞는 말이지만 선생은 말로 가르친 분이 아니었다.​

 


글 전호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